2008-08-23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연이어 출간한 우석훈 씨를 만났습니다. 한국의 20대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경제학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사회를 돌아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인문사회 독서 시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함께 나눴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김현주, 박하영)

   

20대를 위해 쓴 <88만원 세대>

알라딘 : <88만원 세대>는 출간되자마자 책이 품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출간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우석훈 : <88만원 세대>는 철저히 “20대의 입장에서 보고 20대를 위한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20대는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지 않는대요. 몇몇 출판사에서 386세대나 그 윗세대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일부를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처음 만드는 출판사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리 점검해야 하는 부분들을 미처 다 챙기지 못했어요.

알라딘 : 8월 22일까지 <88만원 세대>를 구입한 분들 가운데 20대 독자가 25%입니다. 예상하신 비율과 비슷한가요?

우석훈 : 예상보다 20대가 조금 더 산거죠. (웃음) 책을 기획할 때는 20대가 70% 이상 사주길 바랬는데 주위에서 “그건 무리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20대가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386세대나 50대의 눈에 맞춰 내용을 바꾸지 않고 처음에 생각한대로 마무리했고요. 20대 비중이 좀더 높아졌으면 좋겠는데, 지나봐야 알겠지요.

알라딘: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386세대나 50~60대 분들은 어떤 소감을 밝히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책을 읽은 20대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요, 서평으로만 접한 20대는 “그래서(위기라서) 어쩌라는거야?” 하는 식이죠. 50~60대는 “문제를 어떻게 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요, 386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별 피드백이 없었어요.

알라딘 :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를 2권 더 출간할 예정이시죠? 이 시리즈를 기획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올해로 박사(경제학) 12년차거든요. 10년째 되었을 때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에 대해 그간 생각해온 내용들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기회가 안 됐어요. 그걸 올해 하는거죠. 대선이 끝나고 내년이 되면 사회가 바뀔거고 그때는 이런 책을 출간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내 살길만 찾겠다’는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다

알라딘 : 2007년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보면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이 종합 15위, 신간 가운데서는 4위를 차지했습니다.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위기의 본질이 ‘조직론의 부재’에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기업은 외부와 경쟁하고 내부에서는 경쟁을 줄여야 한다는 게 경제학의 기본 통찰이라고도 하셨는데요. 이른바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 류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조직론의 부재’에 대한 개인 차원의 대응일까요?

우석훈 : 경제학은 구조를 봅니다. 열 명이 가운데 아홉명을 떨어뜨리는 게임일때 그 가운데서 한 명이 되는 게 처세술의 접근이라면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열 명을 살릴지’를 고민하죠. 개개인이 열심히 살려고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고 회사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어요. 사회나 회사가 어떻게 되든 ‘나는 내 살길만 찾겠다’는 건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개인이 그렇게 해도 회사에서 자르기로 한 사람을 안 자르진 않을 거고요. 개인이 대응전략을 세우면 조직은 그것을 솎아내기 위한 대응전략을 금방 만들죠.

위기가 오면 난파선에서 쥐가 먼저 뛰어내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 책이 그 쥐가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건데, 그건 대중적 인기는 높죠. 반면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에서는 배를 가라앉지 않게 할 방법을 논의 하고요.

20대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20대에게 난파선이 아닌 멀쩡한 배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죠. 이런 얘기들은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이 하는데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똑같은 얘기를 개인들한테 하면 거기엔 관심이 있고요. 기본 학문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흐름이죠.

이른바 명문대에서 논술 채점을 하는 교수님들께 들으니 학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논술 채점의 기준이 된대요.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혼자 책을 읽고, 더듬더듬 하면서도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을 찾는거죠. 학원에서는 트랜드라고 가르치지만 결국 논술 답안지에 있어서는 굉장히 떨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회사도 그렇고요. 회사는 유능한 사람을 원하지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사람은 원치 않아요. 처세술 책의 마음은 이해 가지만 개인에게 그렇게 도움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알라딘 : 네, 최근 2~3년 사이에 자기계발서 시장이 정말 크게 성장했습니다.

우석훈 : 사회가 불안해서죠. 어려울 때 종교나 예언서가 유행하잖아요. 사회가 안정되고 삶이 좀 평온해져야 끝이 나죠. 옛날에는 예언서가 유행했다면 21세기에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는 것 같아요. ‘이런 주문 외우면 총 맞아도 안 죽는다’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자기계발서가 주는 처방이 몇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겠죠. 하지만 평균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 한 번도 검증된 적은 없어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신문독자로서 20대가 열악하기 때문에 신문들이 20대를 그저 ‘얼굴 없는 세대’ ‘부모들에게 기생하면서 독립을 포기한 세대’로 치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석훈 : 당연한 거죠. 우리 사회도 마케팅 사회로의 전환이 끝났어요. 마케팅이란 건 구매력 있는 집단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일 아니에요? 20대가 무슨 신문이든 구독을 많이 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20대가 신문을 끊으면 큰일이다고 하면 신문도 20대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겠죠. 한 줄로 뭉뚱그려 쓰지 않고 20대 가운데서도 21살은 이렇다. 22살은 이렇다 하고 풀어 쓰겠죠. 화장품도 마찬가지거든요. 30대가 여성 화장품 시장의 중심이잖아요. 30대 용으로 신제품을 개발해서 라벨링을 없애고 포장을 싸게 하면 20대 용이 되요. 피부민감도는 20대, 30대 모두 다른데 20대용 화장품은 안 만든다는 거죠.

알라딘 : 20대 문제를 고민하는 책을 찾기 힘든 것도 같은 이유일까요?

우석훈 : 어차피 안 살거니까. (웃음) 예를 들어, 농업에 대한 책은 잘 안 쓰잖아요. 농민들은 책을 잘 안 읽으니까. 책 한 권을 쓰려면 저자가 최소 6개월에서 1년을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책을 써도 읽어주지 않으면 결국 고민을 하지 않게 되죠. 90년대 초반을 보면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그 20대의 애환을 담은 소설이 굉장히 많았어요. 공지영 씨 책이 대표적이죠. 그 세대가 이제 서른이 되었다. 또 마흔에 가까워졌다. 그런 걸 담아가는 게 삶의 기록이거든요. 근데 지금 20대를 위한 삶의 기록은 거의 안 나와요. ‘너네는 무식하다’ 너네는 나약하다‘ ’너네는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꾸짖는 책이 좀 나오는데 그것도 주류가 아니죠. 이런 게 결국 고민이 적어진다는 얘기에요. 20대를 다룬 소설도 나오고 시도 나와야 그 다음에 분석서가 따라갈텐데 지금은 그것조차 없어요.

알라딘 : 반면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같은 책이 눈에 띕니다.

우석훈 : 그런데 미치면 더 불행해지죠. (웃음)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거죠.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짱돌이 있을까요?

"짱돌" 얘기는 고민 많이 했어요.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는 모두 생태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해요. 생태적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제개 주문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란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모든 20대를 구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좀 과하죠.

결국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 관심도 없는 거고, 문제를 풀 수도 없어요. 토플책을 덮으라는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 변화로는 문제를 풀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구조화되었다는 것이에요. 그 구조화에 맞서기 위해 자기도 구조화되어야하죠. 제가 생각한 것은 ‘20대 국회의원이 나온다 ’ ‘기업의 주니어 보드 같은 이사회에 20대가 들어간다’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목표로 하면 굉장히 많은 20대가 모여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해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찾는 답이 뭐라고 좋으니 모여서 답을 찾기라도 하라는 거죠. 답이 안 나오면 20대가 아니에요.

대표를 만들고 스스로 조금씩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딪히는 수밖에 없어요. 윗세대는 룰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요. 그들이 제시하는 룰을 하나씩 깨지 않으면 바꿀 방법이 없죠. 이를테면 고시를 보는데 거기에 부당한 문제가 나왔어요. 그럼 다같이 모여서 문제를 그렇게 내면 안 된다고 해야 그게 바뀌죠. 자기 혼자 방에 앉아서 ‘이번에는 떨어졌지만 내년에는 잘 풀어야지’ 해서는 답이 안 나와요.

싸워야죠. 안 되는 걸 안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그런데 20대가 싸워본 경험이 한 번도 없거든요. 소리 지르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 하고, 정색해서 말하면 바로 입을 닫아요. 그래도 싸움을 좀 해봐야죠. 정의롭고 명분있는 싸움 있잖아요. 나와는 상관 없어도 ‘저 사람들 불쌍하다’하며 나서서 싸우는 경험이 필요해요.

386세대는 지금도 ‘우리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하면 광화문으로 모이죠.(웃음) 근데 20대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그래도 참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죠. 그렇게 하면 실체가 못 되는 거에요. 프랑스의 68세대는 평생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어요. 10대때 한번 화끈하게 싸우고 ‘우리 건들면 알지?’하게 된거죠. 그 사람들은 은퇴해서도 풍요롭게 살게 되는 거에요. 혼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렇다는 거죠. 한 두 명은 살 수 있지만, 내가 그 한 두 명이 되긴 힘들어요.


알라딘 : 20대가 쓰는 책도 “짱돌”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20대 저자가 거의 없어요.

우석훈 : 두 가지가 문제인 것 같아요. 일단은 습작기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안 되요. 두 번째는 과감하게 나오는 20대에 대해 사회가 용인하는 분위기가 죽었죠. 요즘은 20대를 애들 취급 하잖아요. 불만이 있으면 날것으로라도 그게 나와야 하거든요. 그래야 피드백이 있죠. 20대 가운데 정교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대신 그때는 메시지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세대간 협동진화죠. 새로운 것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약해졌어요. 결국 이런 게 전체적으로 약자들, 어린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좁힙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만 힘든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힘들어져요.

우석훈이 말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알라딘 : <88만원>세대에서는 20대에게 지금처럼 책 안 읽고는 386세대와 경쟁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일주일에 책 두 권도 안 읽으면서 무슨 엘리트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0대에게 책을 읽으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것 같아요.



우석훈 : 책이라는 게 단순한 정보가 아니에요. 책을 붙잡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끈기를 요구하는 일이거든요. 책은 재미없어요. 좋은 책일수록 그래요.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참고 읽지요. 386세대는 해방 이후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세대인데요. 그렇게 책을 읽은 사람들의 지적, 예술적 능력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또 그 사람들의 자식들이 지금 10대인데요. 청소년 책 시장도 크거든요. 제가 책에서 ‘세대간 경쟁’을 강조했는데, 지금 20대는 그런 386세대나 10대와 경쟁하게 되요. 그러니 책을 읽으라는 겁니다.

알라딘 : 20대때는 어떤 책을 주로 읽으면 좋을까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주세요.

우석훈 :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책을 불신하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그 대신 읽고 싶은 주제를 하나 택해서 가장 최근에 잘 나온 책을 하나 골라요. 거기보면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책들이 쭉 소개되어 있잖아요. 그 계통을 따라 읽고 정리를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식으로 읽으면 자기 지식으로 남아요. 아무거나 막 읽으면 남는 게 없는 것 같고요. 또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쓰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전체를 포괄해서 서평을 쓰기 보다는 읽으면서 배운 것, 기분 나빴던 것 등을 그때그때 정리하는 거죠. 서평에는 과시적인 면이 있는 것 같고요.

알라딘 : 재미를 위해서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우석훈 : 일본 만화를 봐요. 또 요즘은 19세기 영국 소설들을 읽고 있고요. 디킨스나 홈즈 시리즈도 다시 읽고요. 19세기 영국을 다시 읽는 건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유행이에요. 최근에 나온 예술이나 창작들은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에 대응해서 원형들을 보려는 시도를 하는 거죠. 19세기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의 심장이었어요. 21세기 미국 중심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게 파편화되어 있으니까 19세기로 돌아가 그 사람들이 품었던 고민을 보려는 거고요.

알라딘 : 20대에게 어떤 책을 권하고 싶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소설로 먼저 읽고 <스팀보이>라는 일본 만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스팀보이>는 19세기의 영국과 미국 자본의 갈등을 일본 사람이 해석한 거거든요. 일본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고민들이 예술적으로 담겨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그 소설이 나쁜다고 말하는 <스팀보이>를 보면 민족주의, 쇼비니즘, 자본주의의 지나친 경쟁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요.

알라딘 : 마지막으로 알라딘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80~90년대에 아카데미 같은 걸 했잖아요. 조금 길게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강좌를 마련하거나, 책을 읽은 사람들이 창작을 해보거나 토론을 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매개로 사회와 소통하는 부분에서 구심점이 되면 좋겠어요. 또 대부분의 출판사나 작가는 자기 책밖에 모르는데, 알라딘에서 일하는 분들은 출간되는 책을 다 접하잖아요. 그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가 있을텐데, 그런 정보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우석훈 :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인생의 1/4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의 외국에서 지냈고, UN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를 마지막으로 국제협상과 공직생활에서 은퇴했다. 한겨레신문에 '여기는 명랑국토부'을 연재하던 시절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지은책으로 <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국부론>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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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1 통권 573 호 (p160 ~ 180)



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공백기’가 길어졌을 뿐”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 김추자 - 님은 먼 곳에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 선생님의 빅 히트곡인 ‘님은 먼 곳에’의 진짜 작사가가 누구인지를 두고 작사가 유호씨와 작곡가 신중현씨가 서로 자신이 작사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2심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심에선 유씨가 승소). 선생님도 증언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신중현 선생님이 (악보에) 4B 미술연필 같은 것으로 뭔가를 썼다는 기억만 나네요. 유호 선생님의 노랫말 글자 수가 많아서 신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신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과정은 못 봤어요. 다 된 것만 봤지. 그러니 잘 모르죠 뭐. 우리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됐으니까요.”
요즘 젊은 층에겐 조관우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 유명한 ‘님은 먼 곳에’는 1970년 동양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연속극 작가는 유호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이런 곡은 못 부르겠다”고 거절하면서 김추자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됐다. 데뷔 앨범(1969년)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종 가요상을 휩쓸던 김추자는 이 곡으로 스타의 입지를 완전하게 굳혔다. 그는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덩키스의 멤버로, 김추자의 히트곡 대부분은 신중현 작곡이다.
‘님은 먼 곳에’는 그 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가장 호응을 받고 있는 조관우조차 “김추자 선생님의 원곡을 따라갈 리메이크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김추자의 음색은 흉내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 워낙 히트를 하자 “리듬이 내게 맞지 않다”고 거절했던 패티 김도 후일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끼워 넣었다
가사 중 특히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대목에서 ‘꿈도 주고’ 부분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추자의 터질 듯한 몸매와 겹쳐지며 ‘몸도 주고’로 야릇하게 개사돼 불렸다.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이 ‘달려라 허동구’ 후속 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도 ‘님은 먼 곳에’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1971년) 된 바 있다.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 ‘님은 먼 곳에’가 거의 연습 없이 녹음됐다면서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시간 연습하곤 그냥 녹음했지요. 일일연속극 첫 방영이 다음날이었는데 그 전날 노래를 녹음한 거예요. 오전 8시에 콜을 받고 운현궁 스튜디오에 가서 악보를 받은 뒤 11시에 연습과 녹음이 다 끝났으니까요.”
▼ 몇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빗속의 여인’ 앨범도 아침 10시에 모여서 11시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다시 연습 들어가서 4~5시에 녹음을 다 마쳤는데요 뭘. 그 앨범에 20곡가량이 들어갔는데 그걸 2시간 만에 다 녹음했으니까요. 연습은 거의 못 했죠.”
▼ ‘님은 먼 곳에’를 리메이크한 가수가 많은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 다르니 어떻게 평을 하겠어요. 어떤 가수든지 곡을 받고 나면 자기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부르니까 말입니다.”

판소리+솔+사이키델릭
김추자는 2000년대 들어 7080세대 음악의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도 지금껏 TV 브라운관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형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다. 김추자 음반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이제 딱 두 사람 남았다. ‘그리운 사람끼리’ ‘목마와 숙녀’를 부른 박인희와 김추자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추자의 족적은 박인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관중을 압도하는 김추자의 현란한 춤사위와 섹시한 의상을 먼저 논하겠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창법부터 30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구성지면서도 시원스레 탁 트였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은 당시 전위 음악의 장르였던 사이키델릭 음악에 흑인의 한(恨)이 배어나는 솔을 합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성씨는 한을 내뱉는 듯 구성지면서 한편으론 탁 트인 김추자 노래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핫팬츠, 모자, 무릎 아래 리본 차림이다. 의상 설정이 놀랍다.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김추자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판소리나 창을 딱히 어디에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웬만한 노래는 몇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수심가’인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상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제가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국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궁중무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천흥 선생의 초대로 탈춤공연을 한 적도 있죠.”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反戰)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김추자를 두고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부적 재능
사이키델릭과 솔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가수는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추자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를 보였다. 1951년 춘천의 딸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무용학원), 노래학원(개나리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가다듬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김추자의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공부, 노래, 춤,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했으니 춘천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춘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모델이 돼달라고 해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추자 왔다’며 환호해 부끄러워 혼났다”고 한다.
▼ 고교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군요.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처음엔 미대에 가려고 했지요. 대학교수로부터 데생과 구상을 중심으로 레슨도 받고 실습도 열심히 했는데, 실기시험은 합격했지만 필기에서 떨어졌어요. 당시 동국대가 2차라, 그래도 예술 분야를 선택한다는 게 연극영화과였어요.”
▼ 가수가 된 건 어떤 계기였습니까. 신중현 사단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갔고요. 대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게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신 선생님 매니저이던 맹승호씨가 제 형부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 소개로 가게 됐어요. 그때 신 선생님은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대형 가수들과 작업하느라 매우 바빴어요. 그냥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죠. 그 자리에선 별말씀이 없었는데 며칠 후 ‘늦기 전에’라는 곡을 툭 던져주셨어요.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죠. 선생님이 저를 무척 잘 본 모양이에요.”
결국 ‘늦기 전에’는 그의 데뷔곡이 됐다.
▼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 배우던 얘기 좀 해주세요.
“신 선생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춰 노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 거지요. 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이죠. 사이키델릭이나 솔 창법도 신 선생님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 천부적 소질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아버지가 창도 잘하시고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하셨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하셨어요.”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때로는 ‘솔직한 아부’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법. 이번에는 기자의 경험담으로 이야기의 끈을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의 어조는 딱 부러졌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인터뷰가 계속됐다.
▼ 어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님은 먼 곳에’와 ‘봄비’를 불렀습니다.
“오! 그래요. 스케일이 아주 크군요.”
▼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아마 제 술친구들은 ‘내가 김추자와 얘기를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군요. 정 저를 만나기 싫으면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시죠.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방송 보도국인가에서 5분 뉴스에 잠깐만 녹음을 해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언론 때문에)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입도 감옥살이, 몸도 감옥살이.”
▼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듣는데요.
“그렇더라고요. 대개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그러더라고요. 속도 여리고 그런 경향이 있죠.”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김추자의 노래를 널리 좋아했던 것은 그의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김추자의 음악은 7080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인가가 돼 있었다.
▼ 인터넷에 있는 선생님의 팬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팬들이 선생님에게 정기모임에 꼭 한번 나와달랍니다.
“알아요. 회원분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늘 고맙지요. 저도 잠깐씩 들어가 보곤 하는데, 제가 닉네임을 써서 들어가는데도 귀신같이 다 알아요. 카페 회원 중에는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지켜보는지, 정원에 목련이 폈다 뭐가 어떻다 아주 유리문 들여다보듯,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카페 회원들을 취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아이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도 거기 가입돼 있어요. 그 선생님이 처음엔 제가 누구인지 몰랐죠. 아무개 엄마로만 알았지. 나중엔 이런저런 것을 다 상의할 만큼 친해졌지만 제가 김추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영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겨울 그는 다음 카페의 김추자 팬 모임인 ‘김추자 forever(cafe.daum. net/kimchooja)’에 자신의 옛 사진들을 공개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같이 언론매체에서 보지 못한 개인적인 사진들이었다. 카페지기 남종근(53)씨는 “2004년 4월 정기모임을 할 때 김추자씨는 오지 않고 남편인 박 교수가 꽃과 와인, 케이크, 카드 메시지를 들고 왔다”며 “처음에는 퀵 서비스 직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 교수였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 카페 운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이버에도 김추자의 팬 카페(cafe. naver.com/chooja)가 있다. 네이버 팬 카페는 다음 카페와 달리 김추자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한 30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음악적 색채가 짙다. 이곳에는 전문 뮤지션도 많이 속해 있다. 카페지기 김모씨는 “지난해 모임에 김추자 선생이 와인 7병과 카드를 보내왔다. 회원들 중에는 처음엔 신중현의 음악에 심취하다 김추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카페 회원들은 “김추자 선생이 다시 음반을 낸다면 젊은이들에게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의 음악은 너무나 신선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신선하다”니.
   




‘70년대의 효리’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 요즘 젊은 세대들도 김추자 선생님의 노래, 춤, 의상 등 모든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으니까 그렇겠지, 하하하. 내 노래가 왜 좋은가 하면…. 다른 좋은 가수도 많지만 순수함과 세련됨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을 입어야 꼭 세련된 건 아니잖아요. 화장을 안 하고 자연스럽게,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리는 것, 그러면서도 멋이 풍기는 것, 그런 게 세련된 거지. 난 뭘 바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음악도 그래야 제대로 나오지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음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지요.”
기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후반, 교실에서, 또는 소풍 가서 벌어지는 장기자랑의 주메뉴는 노래와 춤이었다. 열 중 아홉은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다.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의 춤도 따라 췄다. 007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손 모양과 비슷한 손가락 춤(이은하의 ‘찌르기 디스코’의 원조)이 그것이다. 골반을 묘하게 뒤흔들며 추는 춤은 내 아버지 세대에게는 수컷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꼬맹이들에겐 또래 속 인기관리 수단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세상 말세’라며 혀를 찼다.
어깨와 손, 골반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추자의 춤은 그에게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별칭을 안겼다. 관능적인 골반춤은 뭇 남성의 가슴을 ‘폭파’시켰다. 그래서 붙은 김추자의 별명이 ‘다이너마이트’다. 요즘 안무가들은 격렬하고 과격한 그의 춤 동작을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이효리가 추는 춤과 흡사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방송사가 대역을 시켜 김추자의 춤을 이효리의 ‘애니클럽’에 맞춰 다시 추게 해봤는데 전혀 무리 없이 잘 맞아 들어갔다.
과거에도 이금희나 펄시스터즈와 같이 노래를 부를 때 춤을 가미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추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이들의 것은 단지 율동일 뿐 노래와 하나 된 춤이 아니었다. 김추자에게 춤과 노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작곡가 신중현은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춘천여고 시절 응원단장을 지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또 어떤가.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몸이 터져라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1970년대의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간첩說의 진상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김추자는 이른바 그 전위적인 춤 동작 때문에 난데 없는 간첩설(說)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짓말이야’(1971년)를 부를 때 선보인 특유의 손짓이 ‘북한과의 수신호’라며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거짓말이야’라는 제목 자체가 유신정권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고 있던 터에 이런저런 이유로 스케줄에 줄줄이 펑크가 나면서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 어쩌다 간첩으로까지 몰리게 됐습니까.
“저는 음악이 주어지면 그때마다 동작이 저절로 나와 거기에 맞추거든요. 그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저더러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거든요.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청와대에서 부른 것과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팍팍 올라가던 저를 꺾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죠. 복합적인 이유로 저를 매장시키려 한 것이겠죠.”
▼ 청와대 제의를 거절해서 이른바 괘씸죄에 걸렸다는 뜻인가요.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가수가 중앙정보부 파티에 불려갔었죠. 1971~72년 언저리쯤입니다. 재벌회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 ‘저무는 바닷가’ 노래를 촬영하러 바닷가 인근의 컨트리클럽에 갔을 때는 녹화 도중에 모 언론사 사장이 밥을 먹자고 해서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블랙리스트 올라

1971년의 김추자.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誤報)가 되고 말았네요.
“만회해야지요 뭐. 그때 (음반을 내기 위해)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지요.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 그런데 왜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남편이 세종문화회관엘 갔는데, 글쎄 제가 그쪽 대관(貸館) 부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음반을 내기로 한 기획자를 비롯해서 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공연을 한다며 대관신청을 마구 해놓은 거예요. 그것도 골든타임에. 저는 동의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공연은 펑크가 났겠죠. 영문을 모르는 회관측에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거고요.”
▼ 음반을 내겠다고 했으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작곡가가 대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2~3명만 곡을 잘 뽑아냈으면 됐는데…. 이름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마음을 많이 썼는데….”

김추자 LP음반, 최고 호가 300만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속의 여인’ ‘비련’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이에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 테니까.”
중고 LP음반 경매시장에서 김추자의 중 희소가치가 있는 음반은 30만원에서 300만원을 호가한다. 그는 1969년 데뷔 앨범 발표 이후 2년 동안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아마 국내 가수 중 해적판 음반이 가장 많이 나온 이도 김추자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공식적인 가수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앨범업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판을 내고 싶어했다. 해적판도 보관상태만 좋으면 경매시장에선 비싼 값으로 낙찰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1971년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이 탄생했는데, 1호 음반의 주인공 역시 김추자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김추자 음반을 40여 장 소장하고 있지만 제일 비싼 것은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잡고 있는 재킷 사진이 실린 음반이다. 그건 내게 없는데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추자가 전부 몇 장의 앨범을 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김추자의 음반 재킷 중에도 쇼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최씨가 소유한 음반 중에는 남성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재킷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넣은 것과 성적으로 절정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을 담았다고 해 ‘섹스신 음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추자 LP를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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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여 서양에서 벗어나라
서양사학회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한겨레 강성만 기자
 






최갑수 교수 ‘한국 현대사 연구 개입’ 주장

“서양을 운위하는 것으로 서양사의 존재성이 인정받는 시대는 지났다. (중략) 아예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올해로 한국서양사학회가 꾸려진 지 50년이 된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5~6일 한국서양사학회 주최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및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리는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에서의 서양사연구, 근대성의 인식과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에 발표한 논문 ‘한국의 서양사학과 근대성의 인식’에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과 이에 대한 서양사학계의 구실을 강조했다.

최 교수가 보기에 지난 50년 국내 서양사학은 ‘근대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해 온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암묵적 합의” 때문에 서양사 연구자들은 단순히 서양의 역사적 경험이나 역사 이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근대성의 핵심 이념을 ‘발전’으로 본 국내 서양사 연구자들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제국주의로 다가온 점이나 (근대성의) ‘인권 혁명’이 예속을 해외로 수출하는 과정을 수반했음을 명쾌하게 짚어내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이런 ‘인식지평’은 해방 직후 한국 역사학이 일본 선례를 따라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삼분돼 출범한 것과 잘 맞아 떨어진다. 서구를 특화시켜 주는 동시에 역사학 내부에 칸막이를 만들어 장기적으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국내 서양사학의 선구자들을 일본이 ‘공급’했다면, 이를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키워낸 ‘원동력’은 미국이었다. 1차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 국민윤리과목으로 도입된 ‘문화사’는 해방 직후부터 각 대학 교과과정에 예외없이 포함됐다. 서양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 과목은 유럽이 이룩한 근대성의 밝은 면만을 주로 부각시켰다. 친서방적인 태도를 길러준 것이다.

서양은 이제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근대화’에서 ‘선진화’로 바뀐 구호가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서양사학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최 교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양사 연구와 교육에 적극 반영하려는 노력”을 넘어서,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최근 몇몇 서양사학자들이 연구중인 ‘과거청산과 집단기억의 역사학’ ‘대중독재론’ ‘영국을 통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비교’ 등의 주제가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그는 서양사학이 역사분쟁을 헤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했던 동아시아 역사세계의 공통의 구조를 발견해봄으로써 자국과 지역사(동아시아사) 사이의 괴리를 뛰어넘어 소통을 꾀하는 것이 온당해보인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02)820-5167.

강성만 기자




 
기사등록 : 2007-07-04 오후 05: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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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국인의 자회상](4)‘보금자리’ 아닌 ‘복권’이 된 아파트
입력: 2007년 06월 19일 17:49:34
 
동창회, 술자리, 회식자리에서 이처럼 검질기게 따라 다니는 주제가 또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가족이 복닥거리며 사는 ‘집’이 아니라 이익이 남으면 털어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야 하는 ‘자산’이 됐다. 사서 한몫 챙길 수 있는, 그러면서도 상당히 승률 높은 ‘복권’이 됐다. 왜 그럴까. 비강남지역 아파트에 거주하는 최상렬씨 등 4명이 4월19일 경향신문사 인근의 한 식당에서 최우규 기자의 사회로 3시간30분 동안 아파트와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비강남지역과 경기지역 소형아파트에 거주하는 최상렬, 김두규, 김문식, 이상섭씨(왼쪽부터)가 지난 4월 경향신문 인근 한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김영민기자>
사회=요즘 사는 게 어때요.

이상섭=맞벌이를 하지 않고는 힘들어요. 친척 부부랑 우리 부부가 결혼생활 시작할 때 종잣돈은 비슷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맞벌이라서 집을 ‘질렀고(상황을 따지지 않고 구매했고)’, 그 집 부부는 남편이 혼자 버는 처지라 못 질렀죠. 우리 집 값이 올랐고, 두 집안 순자산을 비교해보니 1억원 차이가 납니다. 이게 정상이 아닙니다.

김두규=저도 맞벌입니다. 집값이란 게 오를 때는 많이 오르고 떨어질 때는 조금 떨어질 것이라는, 누구나 그런 인식을 하는 것 아닐까요. 집사람은 ‘여기 말고 다른(더 오른) 데 샀어야 하는데’ 하는 말을 합니다.

최상렬=집 한채 가진 사람에게는 집값이 오르는 게 의미가 없어요. 당장 팔아 차익을 실현할 게 아니니까. 저는 원래부터 집에 관심이 없었어요. 뉴스를 보면 샐러리맨이 집을 마련하는 데 평균 7년 걸린다기에 ‘앞으로 4년 정도 있으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아내가 2005년 아파트를 사기로 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죠.

이상섭=첫째 애는 본가에서 봐줬는데 둘째 애가 태어났어요. 아내가 둘째는 직접 키우고 싶어하는 눈치였죠. 그런데 아파트 사느라고 대출받은 1억8000만원에 대한 이자가 한달 120만원 정도예요. 한 사람이 버는 돈은 통장에 하루 머물러 있다가 빠져나가는, 정거장인 셈이죠. 돈 모으려면 맞벌이를 해도, 아는 사람이 결혼도 해서는 안돼요. 축의금 나가야 하니까(웃음). 그렇게 고생해봐야 3년에 3000만~4000만원밖에 모을 수가 없죠. 그런데 애들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고 돈 쓸 데가 많아요. 지금 사는 아파트를 전세주고 줄여서 작은 집에 전세로 들어가고, 둘째는 시골에 내려보내더라도 큰애만이라도 키울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육아와 주택이 다른 문제 같지만 실제는 같은 문제죠.

김두규=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애가 영어학원도 다니고 학교에서 시험도 보고 하는데, 할머니가 봐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한번은 애가 ‘딥송(diphthong·이중모음)’이라는 걸 묻는데 저도 몰랐어요. 학원에 안 보내고 놀이터에서 놀게 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에요. 애 봐가면서, 맞벌이하면서 집 늘리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해요.

사회=꼭 아파트여야 했나요.

이상섭=대출을 받았는데, 이자 보전 정도는 되겠지 싶었어요. 어차피 전세에 살면 전세금을 묵혀두는 데 대한 이자비용이 있지 않나요. 그것을 생각하면 비슷비슷하죠. 다른 것보다 아파트는 가격이 떨어지지 않잖아요.

김두규=전세를 살면 계약 기간이 끝나고 이사가야 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살려면 집을 사야 했죠. 맞벌이 하기 때문에 애를 봐주실 부모님 댁 가까운 곳을 찾다보니 지금 아파트로 가게 됐습니다. 저는 여유가 생기고 은퇴하면 마당이 있는 곳에 사는 게 꿈이에요. 아파트가 안전이나 방범, 집값 등 좋은 요소가 있지만 마당에서 하늘보고 저녁에 삼겹살 구워먹는 게 좋아요.

최상렬=결혼하면서 처음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살아보니 편하더라고요. 집사람은 어릴 때부터 아파트에 살아와서 편하게 생각합니다. 관리비만 내면 알아서 다 해주니까. 전세 4년 살다가 집을 사게 된 계기는 애가 둘이 돼서죠. 애들을 처가가 봐주기로 해서 따라간 거죠. 경기 광주 아파트 전세를 알아봤는데 값이 싸기에 대출받아서 샀어요.

김문식=1998년 결혼해 서울의 서강대 근처 다세대 13평짜리 방을 얻었는데 도둑을 맞았어요. 아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아파트가 일단은 안전문제가 해결이 되죠. 지금 사는 빌라에서도 도둑이 들 뻔했어요. 현관 벨이 울려 아내가 잠결에 ‘당신이야’라고 물으니까, ‘어’라고 대답하더래요. 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고. 도둑이 사람이 있나 확인해보고 그냥 내뺀 거예요. 환금성도 다른 무엇보다 강합니다. 바로 팔아 돈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사회=직장생활하면서 아파트 마련하기가 쉽지 않죠.

최상렬=생애최초 주택구입자금 대출 6000만원을 얻었어요. 20년 상환으로 1년 거치이고, 올해부터 원금을 갚게 됩니다. 그거 때문에 맞벌이가 길어지고 있죠. 아파트는 2배쯤 오르더군요.

김두규=3억원을 주고 샀는데, 1억원을 대출받았습니다. 이자가 100만원쯤 됐는데, 회사를 옮기면서 이전 직장 퇴직금을 받아 갚았습니다. 둘이 맞벌이하면서 9년 만에 빚없는 내집을 갖게 된 셈이죠.

김문식=2000년 아파트 조합 설립 때 참가해 대출 3000만원 포함, 1억3500만원을 주고 샀어요. 집사람 직장이 신촌이고, 그래서 아파트로 안가고 계속 그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지금 사는 빌라에는 2004년 1월 보증금 8000만원에 월세 15만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상섭=지난해 5월 재개발 아파트에 분양권을 사고 입주했어요. 2001년 결혼하던 해 전셋값이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그래서 경기 평촌 15평짜리 아파트를 대출 끼고 8300만원에 샀죠. 집사람 직장이 사당동이어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 뒤 우리 부부는 우스갯소리로 ‘직장이 강남에 있었으면, 가까운 분당에 집을 얻었고 그럼 가격이 더 올랐을 텐데’라는 말을 하곤 해요.

김문식=예전에 전세가 8000만원이라면 매매가가 1억1000만원 하던 때 자기 예산 안에서 안전하게 그냥 전세 산 사람이 있어요. 반면 빌려서라도 ‘에이, 사자’고 한 사람은 돈을 벌었고요.

김두규=운인 것 같아요. 저는 아파트 갈아탈 때마다 재미를 못봤어요. 결혼하기 전에 대출받고,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샀어요. 돈이 안될 거 같아 팔았는데 나중에 올랐습니다. 배가 아프더군요(웃음). 2004년에 31평형 아파트를 샀는데 애가 초등학교까지 들어갈 참이어서 팔아서 본가 아파트 근처로 갔어요. 그랬더니 판 집이 오르더라고요.

이상섭=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 상가 임대료는 강남 수준입니다. 그런데 상가 사람들 ‘집집마다 최소 1억원씩 대출한 상태라서 일반 주택가보다도 구매력이 떨어진다’고 말해요. 집에 몽땅 털어 부었기 때문에 통닭도 한마리도 못시켜 먹는 거죠.

최상렬=지금 살던 아파트를 팔고 서울에 가면 강남으로는 도저히 못가고, 다른 데도 전세밖에 안돼요. 결혼할 무렵 집 장만하기 좋은 때를 놓친 게 아쉬워요. 부동산을 몰랐어요. 1억원짜리 30평대 연립주택인데 수중에 2000만원이 전부였어요. 지금 같으면 무리해서라도 대출받아 샀을 텐데…. 2년 정도 있다 그 연립주택은 재개발로 수용됐고, 죽전 쪽에 조합원 가격으로 아파트 분양권을 주더군요. 그때 연립주택을 샀으면 지금쯤 재산이 6억~7억원은 됐을 거예요.

이상섭=은행에서 집단 대출이라는 걸 해주는데 아파트 거래 가격의 60%까지 돼요. 아직 투기지역이 아니고, 등기가 안돼서 그렇다더군요. 은행에서 하는 말이 ‘등기되면 40%로 떨어지니까 지금 받을 수 있을 때 왕창 받으라’고 하더군요. 제가 창업을 하면서 온갖 서류를 다해갔어도 달랑 500만원 받았는데, 아파트 담보만 하면 그냥 3억원씩 해주는 거예요. 빌라나 단독주택은 그렇게 안돼요.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빌라같은 게 아니라 돈을 잘 받을 수 있는 아파트로 갈 수밖에 없죠.

최상렬=소득에 비해 집값이 너무 올랐어요. 지금 집을 팔면 바로 다음날도 그 돈 갖고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조카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본가에 올 때마다 ‘삼촌집은 몇평이야. 우리집은 현대아파트인데 얼마전에 현대아이파크가 됐다. 우리 동네에는 푸르지오가 제일 좋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얘가 뭘 알겠어요. 어른들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자기들도 그러는 거지.

이상섭=우리 아파트 인근에 경전철이 놓인다고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그런데 얼마전에 경전철이 기차처럼 요금 먼저 내고 타는 식이 아니라 먼저 타고 요금을 계산하는 버스처럼 다니는 것으로 바뀐다고 사람들이 데모를 했어요. 요금을 먼저 내는 방식이 편하다는 거예요. 그래야 집값도 더 오르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집값을 올릴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거 같아요.

김문식=이제 ‘아파트는 돈’이라는 공식이 진리가 됐어요. 농경시대에는 땅 많은 사람이 최고였는데…. 지금은 아파트 몇채를 어디에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직장이 좋아도 불안하고.

최상렬=아파트는 능력보다 큰 것을 사고, 차는 능력보다 작은 거를 타라, 그게 부자되는 길이라고 하더라고요.

김문식=우리 부부는 일산 아파트를 팔아 지금 사는 곳에서 눌러 살기로 했어요. 성산동에 공동육아제가 있는데요, ‘도토리 방과후’라고 공동육아협동조합입니다. 부모가 출자해서 교사를 불러 학교 숙제도 점검해주고 간식도 주고, 부모 퇴근때까지 프로그램 진행도 합니다. 애들에게는 언니, 오빠가 있어 좋습니다. 아파트를 처분하고 지금 전세 보증금을 받으면, 지금 사는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민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파트를 장만하기란 쉽지 않고 어렵사리 장만한 아파트도 비강남권의 경우 강남지역보다 집값이 잘 오르지 않는다. 사진은 서울 강동구 둔촌동 주공아파트 단지.
(공동육아제를 체험한 이를 처음 보는 듯 다른 참석자들은 김문식씨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맞벌이 부부들이 특히 더욱 관심을 갖는 게 자녀 교육이다. ‘부모가 어린이집 운영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데 힘들지 않느냐’는 등 질문이 쏟아졌고, 자신들의 경험담도 이어졌다.)

최상렬=시골에서 중1 때 서울로 전학 왔습니다. 지금 중학교 동창 중에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애들을 생각한다면 정착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중간에 친구와 떨어뜨리는 거는 안좋은 거 같아요.

이상섭=재테크를 할 여건이 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평범한 샐러리맨도 ‘집을 사고난 뒤 나중에 재건축되면 뜬다’고 알지만 돈이 있나요. 2년전쯤 아파트 입구에 ‘하교부터 귀가까지 자녀를 책임진다’는 내용의 학원광고가 붙더군요. 한마디로 집을 마련하기 위해 나머지는 다 ‘아웃소싱’하는 거예요. 부부는 맞벌이 하고, 얘들은 학원으로 내몰고.

최상렬=직장이 서울 강남에 있는데 다닌 지 10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에 강남에 집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요. 종부세가 엄청난데 대출받으면 이자비용에다 종부세까지 부담할 수 있나요.

김문식=유럽에서는 교육문제를 사회적으로 책임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되죠. 그러니 아파트를 갖고 있다가 팔아서 그런 거 해결하는 거죠. 단독주택이면 시세도 보고, 환경도 봐야하고 복잡하지만 아파트는 인터넷으로도 시장 가격이 바로 나오잖아요. 잘 팔리고.

이상섭=정부가 여러차례 부동산 정책을 내놨는데 지난 2월에 나온 것이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치를 왜 지금에서야 내놓았는지. 예전에 총선 직후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할 때 그런 정책을 내놓았으면 지금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아요.

사회=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어떤거죠. 어떤게 행복인지요.

김문식=애가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돈이 제일 문제예요. 학원비다, 뭐다 들어갈 데는 많고. 이제 앞으로 돈 벌 시간이 10년 정도밖에 안남은 거 같고. 그래서 걱정입니다. 행복이라…. 저는 ‘만족’이라고 봐요. 남이랑 비교해보면 끝이 없고, 그저 어느 정도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고. 행복이라는 것도 스스로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군요.

김두규=나이 40이 되고,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되고, 회사에서 부장이 되니까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삶의 무게라고 할까. 가족이랑 오순도순 살고 있으니 그마나 괜찮네요.

사회=정치에 대한 견해는.

김문식=저는 정치인 수준은 그 유권자 수준이라고 봅니다. 정치인 욕해봤자 스스로에게 욕하는 거죠. 참여는 하지 않고, 정치인에 대한 기대 수준은 높고, 뽑아놓고 소홀히 여기고. 그런 모순적인 상황인 듯해요.

김두규=감정적으로는 정치 혐오감, 그런 게 있어요. 당리당략, 싸움, 그런 거죠. 하지만 내 목소리를 내서 고쳐보자거나, 시민운동을 해볼까 하면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사회=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정치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시죠.

김문식=토지공개념이 위헌이 아니라니까 좀 더 밀어붙였으면 해요. 집으로 재산을 불릴 생각을 하지 말도록요. 그리고 뉴타운이니 뭐니 하는 각종 개발은 3~5년에 걸쳐 할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 장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측이 되고 주민도 선택권을 갖고, 투기도 줄어들 거 같아요. 저는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지지하는 정당은 없습니다. 대선 후보 중 아직 확실히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문국현씨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최상렬=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사는 이상 소득에 따라 누리고 사는 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모두가 부동산으로 몰리니 불로소득 개념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을 수 있다면 엄청날 것 같아요. 그런 인식전환의 기반은 마련해줘야 합니다. 요즘 후보 중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나은 거 같아요.

이상섭=1가구 1주택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후보가 있으면 지지하고 싶어요. 주택은 공공재 성격이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아빠와 아들은 타워팰리스 한채에 살고, 엄마와 딸은 아이파크 한채에 살고 이러지는 않죠. 대부분 한 집에 살죠. 또 무주택자들에게도 돈이 없어도 형편에 맞춰 집을 살 수 있게 공영 아파트를 싸게 공급해줬으면 합니다. 고급자재를 쓰지 않더라도요. 민주노동당을 죽 지지해왔고, 심상정 의원을 지지합니다.

김두규=지지할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이 부동산값과 관련해 공급이니 수요니 하면서 얘기하는데 정답을 누가 알겠어요. 정책에 일관성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모든 국민을 투기 전문가로 내몰지 않지요.

〈최우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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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국인의 자화상] “0.7평에 갇힌 희망…탁상에서 어찌 알아”
입력: 2007년 06월 04일 18:15:29
 
“여기는 바깥 세상과 달라. 한번 들어오면 못나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지.”


서울 종로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택희씨가 지난달 16일 자신의 0.7평 짜리 방에서 TV를 보면서 소일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이런 곳이 있을까 싶다. 하루종일 빛을 볼 수 없는 쪽방. 얼기설기 각목이나 쇠파이프로 뼈대를 엮고 비닐과 스티로폼으로 만든 비닐하우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한국, 한 평에 2000만원에서 3000만원 한다는 아파트가 빼곡한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 주거 극빈층이 잃어버린 꿈 사이에서 부유하듯 사는 늪 같은 곳.

비가 내리던 지난 5월16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돈의동. 깔끔하게 정비된 서울 피카디리 극장 광장에 맞닿은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갑자기 어두워진다. 골목길이 두 명이 함께 지나기에도 좁아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건물 사이에 난 길은 매우 복잡하다. 처음 온 사람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굽이굽이 길을 꺾고, 두 손을 잡고 기듯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간이 계단을 밟고 3층에 있는 이택희 할아버지(68) ‘집’에 닿았다.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복도 양쪽으로 문이 3개씩 나 있다. 방문을 열고 0.7평짜리 방에 앉는 이 할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기 몇 번 당했죠. 있는 돈 다 털어먹고 (서울) 을지로 지하철 입구에서 6개월 노숙하다 2000년 12월 여기로 옮겼어요. 친구에게 100만원 빌려 보증금 내고 한 달에 20만원 내면서 살고 있어요.”

젊었을 때 그는 중공업 단지에서 기계 조립하는 일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술 한잔 먹고 도장 찍으라기에 찍었는데 그게 노조 가입서였다. 영문도 모르고 회사에서 쫓겨났고, ‘노조 가입자’라는 낙인은 이후 평생을 쫓아다녔다. 취직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일해 돈을 벌었는데 돈 몇 번 떼이고 나서 종로 쪽방 촌으로 흘러 들어왔다.

여기는 바깥 세상과 달라요. 젊은 놈이나 늙은 놈이나 힘센 놈이 최고지. 위·아래도 없고. 복지관에서 쌀을 독에 넣어놓고 갖다 쓰라고 하는데, 그걸 퍼다가 술 사먹는 놈들도 있고.”

장기 체류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뜨내기는 다르다. 이따금 노숙자들이 하루 7000~8000원을 내고 들어와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들기도 한다. 싸움도 곧잘 일어난다. 벽이 원체 얇아 그 소리가 다 들린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이용하고, 세수는 1층 수도쪽지에서 대충 한다. 그런데도 이 할아버지는 “여기 사는게 중독성이 있는 거 같다”고 한다.

“한번 들어오면 못 나가요. 돈도 없고, 나가 봤자 여기보다 나은 데 찾기도 어렵죠. 양로원 같은데 갔다가도 다시 돌아옵디다. 기도해라, 몇 시에 일어나고 자라, 담배와 술은 안된다 이러니 답답하고. 그러니 다시 오는 거 같아요.”

부인과는 이미 7, 8년 전부터 연락이 안된다. 빚쟁이들이 쫓아다니니까 남들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단다. 자식과도 연락이 안된다. 그나마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등록돼 한 달에 37만원을 받는다. 거기서 월세 20만원 떼고, 당뇨 약값 내고, 담배 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정부’ ‘정치인’ 단어가 나오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선거철만 되면 누군지 몰라도 비디오 찍어가고 뭐든지 해결해주겠다고 하지만, 말짱 헛것”이란다. 그는 “이제 이 동네 사람들은 그런 말 안 믿는다. 하도 속으니까 비디오나 사진 찍자고 해도 안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택희씨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16일 좁고 어두운 쪽방촌 입구를 들어서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정근 기자
박창석씨(69) 방도 다르지 않다. 1평이 안되는 쪽방에는 TV, 전기밥솥, 그릇 3개 겨우 놓을 밥상, 간이 책장이 세간의 전부다. 신의주 출신인 그는 1·4 후퇴 때 내려왔다. 선친은 주택 건축 일을 했고, 자신은 명문 사립대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유통업을 하면서 전국에 지점 15곳을 거느린 적도 있단다.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왔는지 묻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신 그는 “의정부 집을 전세로 돌렸다가, 여관으로 갔다가 하숙집, 여인숙을 거쳐 이리로 왔다. 처음에는 며칠만 있으려다 주저앉아 5년이 지나갔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밥을 지어 전기 밥솥에 보관하면서 1주일 저녁 식사를 해결한다.

박씨는 수 일 전에 찾아왔던 공무원들을 떠올리며 “꼭 왜놈 순사들 같두만”이라고 못마땅해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조를 통해 느낄 수 있어. 한 서른살이나 됐을까 하는 공무원이 ‘왜 그 학력을 갖고 여기 사느냐, 임대아파트에도 능력이 없어 못 들어가겠네, 양로원에 들어가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이따위로 말을 하드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고 다 자기 본위야. 꼭 논문 쓰는데 서론, 본론 없이 지 맘대로 결론을 지어놓고 온 거 같았어.”

정부에 충고를 한다. 그는 “돈과 인원이 부족하다는데 그 것은 문제가 아니지. 높은 관리들, 책상 앞에 앉아 있지 말고 운동화 신고, 볼펜이랑 수첩 들고 ‘발품’을 팔아봐라. 그럼 왜 안되겠느냐”고 했다.

인영애씨(58·여)도 사업에 실패하고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재산 다 날리고 가방 하나 짊어지고 2004년 이곳으로 왔다. 어려서 침을 잘못 맞아 발 한 쪽이 돌아간 장애인이다. 1층 반지하 방에 살고 있지만 수도꼭지가 바로 문 앞에 있고, 집 주인의 세탁기도 함께 사용할 수 있어 남들보다 처지가 낫다.

인씨는 공공근로 등 일을 하고 싶지만 이마저 못한다.

“몸도 불편하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면 기초생활수급권자 자격을 잃어요. 노점상을 해도 ‘하루 1만원 이상 벌 수 있을 것’이라며 수급권을 박탈하고. 그래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못합니다. 정부 보조도 받으면서도 일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이곳 사람들은 ‘사람의 체온’이 그립기만 하다. 인씨 벽 한 쪽에는 누렇게 바랜 자국이 있다. 한 대기업 직원이 부인, 애 둘과 봉사활동을 와서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은 자리였다. 그 뒤로는 오지 않고 사진 볼 때마다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아예 뗐다고 한다. 출가한 딸이 하나 있지만 이따금 찾아가볼 뿐, 자기를 부양할 처지는 아니란다.

“꿈이 있다면, 조금 있으면 환갑인데 그 전에 임대주택이라도 하나 얻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 여기 월세금 20만원인데 그 정도는 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보증금 문제가 있어서….”

이 동네 사람들을 돌보는 ‘종로 쪽방 상담소(02-747-9074~5)’에는 조재휘 소장과 김종한 실장 등 사회복지사 4명이 있다. 김실장은 “이 인근 1000평 정도에 건물은 100여개 조금 안 된다. 건평이 12~13평 정도다. 방은 1.5평에서 0.7평 정도다. 500여명이 장기투숙하는데 30대부터 70대까지 있다”고 전했다.

쪽방 상담소는 사회복지시설로 인정을 못 받아 이곳 소속 복지사의 처우도 열악하다. 소장 월급이 160만원, 다른 이는 150만원 정도다. 김실장은 “사회복지사들이 결혼 할 때쯤 되면 나가서 택시를 하거나 분식집을 차린다. 복지사를 하면 돈도 못 벌고, 호봉도 인정 못 받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65세 이상 노인이나 거동이 어려운 이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고, 문화행사를 진행해준다. 매일 쪽방촌 노인들 방을 돌아보며 불편한 게 없는지 묻는 것도 이들 몫이다. 조소장은 “정치 1번지, 서울의 한 복판이라는 종로에서 한 골목 뒤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다들 놀란다”고 말했다. 그게 쪽방촌이다.

〈글 최우규·김동은|사진 김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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