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1)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야마시로 : 가라타니씨의 『트랜스크리틱』은 『군조오』(群像) 4월호에서 완결되었지만, 나는 그 후반부, 특히 그 「맺음말」을 읽고 이 연재 전반부의 칸트론이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같은 이전의 맑스론과의 차이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라타니씨라면 그러한 것은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90년에 나온 이와이 카쯔히토(岩井克人)씨와의 대화 『끝없는 세계』에서는 그 후반부에서 가라타니씨는 코뮤니즘에 대하여 「세계자본주의가 곧 코뮤니즘이다」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을 말하지 않고, 코뮤니즘과 세계자본주의를 직접 연결하여 말하는 가라타니씨의 표현에는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남았다. 그런데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치형태론을 기초로 하면서 자본에 대한 저항원리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전회이며 변모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탐구Ⅰ』 이후의 주장인 「파는 입장」의 논의에 관한 것입니다. 「파는 입장」을 강조한 가라타니씨의 논의는 대단히 자극적이긴 하지만, 그 때 이후 내가 줄곧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노동력을 파는 입장이라는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력을 판다, 예를 들면 실업자가 직업을 찾는다, 여기에도 「파는 입장」 일반에 관계된 목숨을 건 비약이 있는 것이지만, 그 윤리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원리가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사는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자본에 대한 투쟁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것도 대단한 이동이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씨의 경우 논점의 이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의 맑스론의 결론부의 이동은 그러한 것과 차원이 다른 커다란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가라타니 : 야마시로씨로부터 『끝없는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소련 붕괴의 시기에 썼던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소련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보통의 코뮤니즘 혹은 사회주의로서 생각되었지만, 코뮤니즘은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자본주의의 진전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페르시아만 전쟁 후에 세계자본주의를 아이러니컬하게 긍정한다는 입장은 그 아이러니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긍정밖에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단계에서 지금까지 데리다나 들뢰즈가 갖고 있는 비평성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들뢰즈나 데리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자인 것을 처음 표명한 것이며, 그것을 알지 못했고 또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얼치기는 여전히 데리다나 들뢰즈를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80년대까지 래디컬한 의미를 갖고 있던 사상이 90년 이후 그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그런 단계에서 나는 새롭게 맑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세계」라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종말을 항상 연장시켜 가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운동(자본축적의 운동)은 신용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종교적인 세계와 같습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종교의 편이 거기에서 온다. 자본축적의 욕동은 물(物)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나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환가능성 권리의 축적에 대한 욕동으로 개개의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쾌감원칙의 피안」에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욕동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운동은 자동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과반수가 죽어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면 실제로 환경오염이나 식량위기로부터 인류의 과반수는 죽겠지요. 그것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은 끝나지 않지만, 그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이 없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동기 이외에는 없다. 맑스의 경우도 코뮤니즘의 동기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것은 초기부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윤리적인 동기가 강하다 해도 자본의 운동 자체에 그 계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자본의 운동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예전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본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점차 궁핍화시키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기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혁명이 발생한다고. 이것은 공황대망론(恐慌待望論)이나 카타스트로피대망론으로 지금까지도 있는 사고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불황은 자본축적의 발전에서 하나의 과정이며,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며, 그것을 노동자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양기(揚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그 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현상보다도 나쁜 상태로 귀착되어 버린다. 현재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불평등이나 폐해를 국가적인 재분배에 의해 시정해 나간다고 하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로 유럽제국도 미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프트한 국가자본주의이며 자본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그것이 자본의 축적과정이라는 것을 소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신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업주체와 소비자주체가 있고 시장에서 생산과 교환이 조정된다고 하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결국 시장경제는 G-W와 W-G라는 교환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환이 화폐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한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G-W와 W-G는 G-W-G'라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자본의 운동을 은폐하고 교환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경제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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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비트겐슈타인의 절망과 <철학적 탐구>

 

* 담론비평(2007. 4. 15)  /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경희대 대학원신문 150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적 탐구』

 

이승종 연세대 교수, 철학 master@dambee.net

 

   
▲ 비트겐슈타인
1930년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절망스런 표정으로 친구 드루리를 찾아왔다. 친구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케임브리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한 서점을 지나쳤다네. 그 창문에는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더군. 좀 더 걸어 음악 상점에 이르러 나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초상화를 보았어. 이 초상화들을 비교하면서 나는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 정신에 불어 닥친 가공할 타락을 강렬하게 느꼈다네.”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타락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상가와 음악가의 비교. 그리고 거기서 느낀 사적인 감정. 그것은 그의 철학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절망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도 그는 이 시대를 암흑기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작품(『철학적 탐구』)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수고를 덜도록 하고 싶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싶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이러한 말이 앞서의 에피소드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이 절망한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수고를 덜게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이들은 전문 과학자들이었다. 러셀은 『수학의 원리』를 집대성한 수학자였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간주한 정신의학자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물리학자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들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의 과학적 사유 방식이 인간 정신이 체험하는 각각의 불안에 대한 답변으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학이 제시하는 이론적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를 덜게 한다. 그들의 이론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아예 그런 수고를 할 엄두를 낼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과학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쾌거라고 칭송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의 아웃사이더요 비판자였다. 그가 『철학적 탐구』의 표어로 선택한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네스트로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이 작품이 반시대적 고찰임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진보는 언제나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진보를 목격하고 칭송했던 과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정신의 퇴보를 목격했고 절망했다. (앞서 ‘타락’으로 옮긴 ‘degeneration’은 ‘퇴보’로도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거기서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퇴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학이 조장하는 진보에 대한 신앙은 일상인들의 생활세계와 경험과 언어를 위협한다. 집합론의 옹호자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옹호자들은 각각 시공간과 인식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크게 잘못된 것처럼 꾸짖는다. 과학은 이처럼 생활세계와 거기에 뿌리내린 일상적 경험을 부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권위로서 군림하려 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그로부터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의미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물론(혹은 물리주의)의 도그마와 그것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의 창궐을 보았다. 찬양의 대상이었던 신이 그 존재를 증명 받아야 할 수상스런 가정으로 변모하고, 윤리적 언명이 ‘자연주의적 오류’로 지적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일상 언어를 부정하고 이를 보다 진보된 인공 언어로 대체함으로써 철학의 진보를 이룩하려는 프레게와 러셀의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은 콰인에 와서 자연주의(자연과학주의)라는 이름으로 철학(인식론)이 과학의 한 장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프레게와 콰인 사이의 시대를 살다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에서 현대영미철학의 이러한 일방적 경향성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그의 이 작품은 4세기경의 성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미 의미를 사물로 환원하는 의미의 물화(物化;reification) 현상을 목도한다. 의미의 물화는 후에 콰인과 데리다가 적시하듯이 의미의 불확정성, 의미 회의주의, 의미 허무주의를 야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나 러셀이 아닌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 정신에 현실로 불어 닥친 가공할 타락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바로 그 정신의 중심으로부터 예비되었던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창시자가 아니라 분석철학의 이념을 그 근원에서 해체하려 했던 포스트 분석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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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도올, 김훈을 만나다

 

 

중앙일보(07. 04. 13)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많이 인터뷰한 기자가 있다면 김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기자가 되었고, 김훈은 당대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엊그제 우연히 그가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소설, '남한산성'을 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중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기자 도올이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해 보면 어떨까? 김훈과 나는 대학(고려대)을 같이 다녔다.그는 영문과에서 영시를 외우고 있었고 나는 한시에 탐닉하고 있었다. 1982년 귀국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도 한국일보 기자 김훈이었다.



"암울했지요. 6.25 전쟁의 찌꺼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했고,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이 태동했고, 베트남에 가서 우리 친구들이 죽어갔고, 더 거대한 지옥이 예비되어 있었던 그 시대에 난 밝은 희망만을 품고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키츠를 암송하고 있었죠. 그들의 낭만주의 혁명성 속에는 인간의 희망, 번영, 평등,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어요."

- 난 대학 시절에 이미 영문과 김치규 선생님과 한시를 주고받곤 했는데, 김 선생님은 대단한 영시의 시인이기도 하셨죠.

"김치규 선생님은 주로 고전을 가르치셨고 전 여석기.이호근 선생님께 더 많이 배웠어요. 운에 맞춰 암송하는 숙제가 많았는데 지금도 19세기 낭만주의 시를 대부분 정확히 암송해요. 전 주입식 교육의 위대성을 그때 깨달았어요. 도대체 주입식 교육이 왜 나쁘죠? 디시플린을 안 가르치는 교육을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까?"

- 그때부터 이미 소설 쓰기를 작심했나요?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을 많이 뒤져야 했기에 주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난중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죠.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영시에 비하면 참 딱딱하고 드라이한 한 군인의 단편적 진중일기에 불과한 책이었어요. 그런데 암울한 현실을 끝까지 암울하게 뚫어 나가더군요. 19세기 낭만주의 시들처럼 찬란한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절망을 끝까지 절망으로 버티어내더군요. 그때 난 낭만주의적 희망의 허구성을 깨달았어요. 동시에 모든 이념의 허구성을 같이 버렸어요. 그랬더니 삶이 더 절망스러워지더군요. 그리곤 대학도 졸업 못했죠. 소설을 쓸 엄두도 안 났고요."

- 그런데 한 가닥의 빛도 안 보이는 그 절망감을 어떻게 버티어 냈습니까?

"기자생활로 이럭저럭 뒹굴다가 83년 봄 우연히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에서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내용의 글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올 선생님의 글이었어요. 저에게는 그것은 새로운 문체의 발견이었어요. 볼티지가 있는 글이었죠."

-기자로서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좀 쑥스럽군요. 그런데 볼티지라니?

"볼티지가 있어야 감전이 되잖아요. 사유의 깊이와 압축감, 과감한 절제, 그리고 거침없는 포효, 그리고 리듬감 있는 음악성, 그리고 생동하는 그림이 퍼뜩퍼뜩 스쳐 가는 영상미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전압이 확보되는 것이죠. 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설을 한번 써 보시라고 했잖아요. 전 그때부터 다시 문학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김훈과 같은 문호에게 나의 정신세계가 조금이라도 도움되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시 '칼의 노래'에서 대중이 사랑한 것은 김훈의 절제된 문체일 거예요. 그리고 그 문체가 이순신이라는 한 군인이 치열한 전화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독한 심리적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데 여태까지의 소설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강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너무 까다롭고 유미론적이고 너무 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많은 사람이 내 문장을 수사학적 문장이라고 평하는데 전 오히려 형용사, 부사 없는 글을 쓰고 싶어해요.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동편제 같은 글, 서편제의 계면이 빠진 그런 진솔하고 우람찬 우조 같은 글 말이죠. 그런데 주어, 동사조차 수식이라고 까대면 난 죽어야죠. 아니면 선(禪)의 침묵으로 가야죠."

- 역시 영문학도다운 얘기군요.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해요.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죠. 김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전 우리말의 조사가 싫어요. 우리말에서 토씨를 빼면 나머지를 메우는 개념어, 지시어, 행위어는 대부분 한문이에요. 영어는 '아이 러브 유'하면 토씨 없이도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은 '가'니 '를'이니 이런 토씨를 쓰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죠. 토씨 없으면 신택스가 성립 안 해요. 법전의 우리말을 보세요. '사기는 타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라고 하면 토씨 빼놓고는 다 한자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수백 년 동안 그것을 열심히 쓰지 않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죠. 우리말은 아직 개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토씨만 있는 언어! 참 걸리적거려요. 전 조사의 매개 없이 단어와 단어가 맞부닥쳐 전압을 발생시키는 그런 언어를 쓰고 싶어요."

-김훈은 그런 언어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자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사회의식? 뭔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그건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한다고 이념적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진보인 줄 알았더니 보수네? 이따위 얘기들이 모두 개념 규정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데서 파생하는 오류일 뿐이죠. 진보니 중도니 보수니 이따위 말들이 다 엉터리고, 노무현에게는 애초부터 진보도 보수도 없었던 겁니다. 의미 없는 비연속에다가 일관성을 운운치 말자는 것이죠."

- 도덕적 일관성(moral integrity)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 국가의 목표가 도덕일 수는 없습니다. 이익이죠. 이익 추구에 실패하면 부도덕해질 뿐이죠."

- 맹자는 국가의 목표가 도덕적이면 오히려 부강해진다고 말했는데?

"그건 까마득한 이상이죠.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 그럼 한.미 FTA는 잘한 짓이고 그로 인해 한국민이 잘살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그런 걸 점칠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념, 빈부, 교육, 의료, 재산, 기회,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내면 되죠."

- 진부한 신자유주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글쎄요. 전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전 사실 이런 철학을 도올 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동의하시잖아요?"

- 내 사상에도 분명 아나키스틱한 측면이 있지요.

"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이겠지만 저는 폭력과 악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 약육강식에 우리 존재를 내맡기자는 것입니까?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 뿐이죠.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나 김훈의 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올의 명언입니다. "

- 그래 소설가가 되어 행복해졌습니까?

"생각보다 책도 좀 팔렸고, 애들이 다 직장 구해 집을 나갔고, 아내는 여행 열심히 다니고, 대부분 집에 홀로 있습니다. 토굴을 지키는 스님같이, '혼자 있음'(Being alone)의 존엄을 즐기고 삽니다. 우리 사회 병리현상의 상당 부분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해 생기는 것 같아요. 외롭다는 핑계로 파당을 만들고 추저분한 짓을 하는 것이죠."

- 저런, 부럽소.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시는구료.

"안 그래요. 선생님은 항상 자신의 성취를 부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시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통쾌감을 주는데."

-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내가 잘 불렀죠.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저도 그래요. 항상 초년병, 영원히 신인 작가로 살다 죽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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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들뢰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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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멍든 눈의 끔찍한 사연

어제 산 한국일보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오늘 아침에야 읽었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사를 아이템 삼아서 페이퍼를 올린다고 해놓고 시간을 못 내다가 겨우 몇 자 적는다(아마도 마무리까지는 며칠 걸릴 것이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남미문학의 두 거장 마르케스와 바르가스 요사가 30년간 서로 앙숙관계였다고 한다. 최근에 이 두 사람이 화해에 이를 것 같다는 것인데, 그런 관계의 빌미가 되었던 30년전 사건(사진)과 그 사연이 기사의 내용이다. 이 '멍든 눈의 끔찍한 사연'은 책으로 출간됐다고 하는데,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단은 '세계의 책'에 올려놓는다.     

한국일보(07. 03. 14) 마르케스와 요사 '30년 동안의 불화' 이제 끝?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80ㆍ왼쪽 사진)와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이름이 오르내리는 <세상종말전쟁>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2ㆍ오른쪽)의 공통점은?

‘남미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현대문학의 거장들’이 ‘알려진’ 답안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정답이 또 있다. ‘30년간 말도 안 한 원수관계’다. 마르케스의 80회 생일을 맞아 절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된 원인을 짐작케 하는 사진들이 최근 공개됐다.



13일 영국 더 타임스에 따르면 멕시코 신문 라 호르나다는 마르케스의 친구 로드리고 마요가 1976년 찍은 두 장의 흑백사진을 최근 공개했는데, 바로 왼쪽 눈 아래 시퍼런 멍이 들고 콧잔등에 상처가 난 젊은 마르케스의 모습이다. 현대문학의 가장 유명한 견원지간의 기원을 밝혀줄 이 사진들의 배후에는 여자문제가 얽혀 있다. 사건은 영화 시사회를 보기 위해 수많은 남미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모였던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롬비아 출신 마르케스와 페루 출신 바르가스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살면서 부부끼리도 돈독한 우정을 다졌다. 영화 상영 후 마르케스는 오랜만에 만난 요사가 반가워 반갑게 그를 껴안았지만, 요사는 “바르셀로나에서 내 아내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감히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할 수 있지?”라며 수차례 마르케스의 얼굴을 휘갈겼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마르케스는 코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틀 후 마요는 마르케스의 시퍼런 눈을 사진으로 찍었다.



절친한 친구사이가 주먹질 하는 관계로 전락한 사연은 이렇다. 두 부부가 바르셀로나에 살 당시 요사는 스웨덴 미녀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났던 ‘전과’가 있었는데, 그때 요사의 부인에게 위안이 돼 줬던 마르케스 부부가 그녀에게 요사와 이혼하라는 충고를 해줬다는 것이다. 후에 요사는 부인과 화해했고, 그녀가 요사에게 전말을 얘기하면서 그것이 느닷없는 폭력사태의 원인이 됐다는 게 추론이다. 요사의 분노 뒤에는 이혼 권유 이상의 중요한 배신 행위가 있었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30년간 비밀스럽게 간직됐던 사진들이 6일로 80회를 맞은 마르케스의 생일을 기념해 <멍든 눈의 끔찍한 사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면서 마르케스와 요사의 ‘30년간의 고독’에도 해빙무드가 감돈다. 요사가 마르케스의 고전 <백년동안의 고독>의 초판 발행 40주년을 기념해 서문을 써주기로 한 것.

그날의 앙금 이후 마르케스는 쿠바 지도자 페델 카스트로와 긴밀한 우정을 키워가면서 좌파 작가의 길을 걸었고, 요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숭배자가 돼 우파 후보로 페루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30년간 다른 길을 걸으며 반목한 두 문학 거장이 주는 교훈. “남의 부부싸움에는 절대로 참견하지 말라.”(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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