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비트겐슈타인의 절망과 <철학적 탐구>

 

* 담론비평(2007. 4. 15)  /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경희대 대학원신문 150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적 탐구』

 

이승종 연세대 교수, 철학 master@dambee.net

 

   
▲ 비트겐슈타인
1930년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절망스런 표정으로 친구 드루리를 찾아왔다. 친구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케임브리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한 서점을 지나쳤다네. 그 창문에는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더군. 좀 더 걸어 음악 상점에 이르러 나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초상화를 보았어. 이 초상화들을 비교하면서 나는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 정신에 불어 닥친 가공할 타락을 강렬하게 느꼈다네.”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타락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상가와 음악가의 비교. 그리고 거기서 느낀 사적인 감정. 그것은 그의 철학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절망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도 그는 이 시대를 암흑기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작품(『철학적 탐구』)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수고를 덜도록 하고 싶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싶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이러한 말이 앞서의 에피소드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이 절망한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수고를 덜게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러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이들은 전문 과학자들이었다. 러셀은 『수학의 원리』를 집대성한 수학자였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간주한 정신의학자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물리학자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들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의 과학적 사유 방식이 인간 정신이 체험하는 각각의 불안에 대한 답변으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학이 제시하는 이론적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를 덜게 한다. 그들의 이론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아예 그런 수고를 할 엄두를 낼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과학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쾌거라고 칭송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의 아웃사이더요 비판자였다. 그가 『철학적 탐구』의 표어로 선택한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네스트로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이 작품이 반시대적 고찰임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진보는 언제나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진보를 목격하고 칭송했던 과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정신의 퇴보를 목격했고 절망했다. (앞서 ‘타락’으로 옮긴 ‘degeneration’은 ‘퇴보’로도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거기서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퇴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학이 조장하는 진보에 대한 신앙은 일상인들의 생활세계와 경험과 언어를 위협한다. 집합론의 옹호자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옹호자들은 각각 시공간과 인식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크게 잘못된 것처럼 꾸짖는다. 과학은 이처럼 생활세계와 거기에 뿌리내린 일상적 경험을 부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권위로서 군림하려 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그로부터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의미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물론(혹은 물리주의)의 도그마와 그것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의 창궐을 보았다. 찬양의 대상이었던 신이 그 존재를 증명 받아야 할 수상스런 가정으로 변모하고, 윤리적 언명이 ‘자연주의적 오류’로 지적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일상 언어를 부정하고 이를 보다 진보된 인공 언어로 대체함으로써 철학의 진보를 이룩하려는 프레게와 러셀의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은 콰인에 와서 자연주의(자연과학주의)라는 이름으로 철학(인식론)이 과학의 한 장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프레게와 콰인 사이의 시대를 살다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에서 현대영미철학의 이러한 일방적 경향성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그의 이 작품은 4세기경의 성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미 의미를 사물로 환원하는 의미의 물화(物化;reification) 현상을 목도한다. 의미의 물화는 후에 콰인과 데리다가 적시하듯이 의미의 불확정성, 의미 회의주의, 의미 허무주의를 야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나 러셀이 아닌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 정신에 현실로 불어 닥친 가공할 타락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바로 그 정신의 중심으로부터 예비되었던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창시자가 아니라 분석철학의 이념을 그 근원에서 해체하려 했던 포스트 분석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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