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1)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야마시로 : 가라타니씨의 『트랜스크리틱』은 『군조오』(群像) 4월호에서 완결되었지만, 나는 그 후반부, 특히 그 「맺음말」을 읽고 이 연재 전반부의 칸트론이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같은 이전의 맑스론과의 차이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라타니씨라면 그러한 것은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90년에 나온 이와이 카쯔히토(岩井克人)씨와의 대화 『끝없는 세계』에서는 그 후반부에서 가라타니씨는 코뮤니즘에 대하여 「세계자본주의가 곧 코뮤니즘이다」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을 말하지 않고, 코뮤니즘과 세계자본주의를 직접 연결하여 말하는 가라타니씨의 표현에는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남았다. 그런데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치형태론을 기초로 하면서 자본에 대한 저항원리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전회이며 변모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탐구Ⅰ』 이후의 주장인 「파는 입장」의 논의에 관한 것입니다. 「파는 입장」을 강조한 가라타니씨의 논의는 대단히 자극적이긴 하지만, 그 때 이후 내가 줄곧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노동력을 파는 입장이라는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력을 판다, 예를 들면 실업자가 직업을 찾는다, 여기에도 「파는 입장」 일반에 관계된 목숨을 건 비약이 있는 것이지만, 그 윤리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원리가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사는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자본에 대한 투쟁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것도 대단한 이동이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씨의 경우 논점의 이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의 맑스론의 결론부의 이동은 그러한 것과 차원이 다른 커다란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가라타니 : 야마시로씨로부터 『끝없는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소련 붕괴의 시기에 썼던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소련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보통의 코뮤니즘 혹은 사회주의로서 생각되었지만, 코뮤니즘은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자본주의의 진전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페르시아만 전쟁 후에 세계자본주의를 아이러니컬하게 긍정한다는 입장은 그 아이러니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긍정밖에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단계에서 지금까지 데리다나 들뢰즈가 갖고 있는 비평성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들뢰즈나 데리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자인 것을 처음 표명한 것이며, 그것을 알지 못했고 또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얼치기는 여전히 데리다나 들뢰즈를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80년대까지 래디컬한 의미를 갖고 있던 사상이 90년 이후 그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그런 단계에서 나는 새롭게 맑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세계」라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종말을 항상 연장시켜 가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운동(자본축적의 운동)은 신용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종교적인 세계와 같습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종교의 편이 거기에서 온다. 자본축적의 욕동은 물(物)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나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환가능성 권리의 축적에 대한 욕동으로 개개의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쾌감원칙의 피안」에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욕동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운동은 자동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과반수가 죽어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면 실제로 환경오염이나 식량위기로부터 인류의 과반수는 죽겠지요. 그것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은 끝나지 않지만, 그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이 없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동기 이외에는 없다. 맑스의 경우도 코뮤니즘의 동기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것은 초기부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윤리적인 동기가 강하다 해도 자본의 운동 자체에 그 계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자본의 운동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예전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본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점차 궁핍화시키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기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혁명이 발생한다고. 이것은 공황대망론(恐慌待望論)이나 카타스트로피대망론으로 지금까지도 있는 사고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불황은 자본축적의 발전에서 하나의 과정이며,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며, 그것을 노동자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양기(揚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그 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현상보다도 나쁜 상태로 귀착되어 버린다. 현재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불평등이나 폐해를 국가적인 재분배에 의해 시정해 나간다고 하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로 유럽제국도 미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프트한 국가자본주의이며 자본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그것이 자본의 축적과정이라는 것을 소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신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업주체와 소비자주체가 있고 시장에서 생산과 교환이 조정된다고 하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결국 시장경제는 G-W와 W-G라는 교환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환이 화폐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한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G-W와 W-G는 G-W-G'라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자본의 운동을 은폐하고 교환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경제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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