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은 오고

배웅하지 않아도 시간은 간다.

 

내 것이나 내 것이 아닌 시간.

돌아보고 돌아보다

괜스레 쓰라린 자리가 되는, 12월.

 

이 달에 내가 주목한 도서들을 차곡차곡 적어본다.

 

 

 고요함이 들려주는 것들
마크 네포 지음, 박윤정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11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부제에 마음이 끌려 책을 열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야 할 일들을 내려놓고 고요하게 자신 안에 고여 있어 보는 일이 아닐지. 저자는 두 번의 암투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서성이며 겪었던 내면의 변화, 삶과 시간, 순간을 다르게 바라보며 되찾은 삶에 대한 열정을 기록하고 있다. 짤막하게 기록된 내용들은 읽는 이에게 보다 긴 여운과 생각을 남기게 될 것 같다.  죽음과 삶의 사이에 늘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있는 자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할 책.

 

 

 그림꽃, 눈물밥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치열한 삶이 줄 수 있는 에너지를 알고 있다. 그에게서 그런 에너지를 느꼈다. 가난과 부모의 반대, 무명시절, 자살시도...... 어둠을 뚫고 나와 눈부신 성공을 이뤄낸 그의 그림엔 삶의 슬픈 생기가 느껴지지 않을까. 무언가에 묵묵히, 치열하게 자신을 쏟아 온 그가 이제 들려줄 수 있게 된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의 그림을 보며 함께 듣게 될 그의 삶 이야기가, 그가 딛고 올라선 그림과 눈물의 무늬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의 고백을 응원함과 동시에.

 

 

 

 

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떠나지 못한 나는 이렇게 여행자의 발자국을 어루만진다.  

너무나 잘 알려진, 미워할 수 없는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떠나고 돌아와 남긴 기록들. 이것이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은 이제야 알았지만, 그모든 곳에 이병률 시인이 동행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지만. 어쩐지 그들의 눈 속에 담긴 풍경들을 훔치고, 그들의 문장을 내 것으로 하고 싶은 마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남긴 글이니 만큼 다양한 시선과 느낌을 만날 수 있어 기대가 되는 책. 제목이 주는 따뜻함도, 너무 좋다.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안도현 지음 / 도어즈 / 2012년 11월

 

그의 이름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책. 안도현 시인의 삼 십년 작품들 사이에서 골라 낸 빛나는 문장들을 담고 있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적 감수성과 동시에 시대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문장이 늘 인상 깊었던 분이다. 그 분의 작품들을 모두 만나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마 그 분의 자취를 띄엄띄엄 더듬어 보는 것도 많은 여운을 갖게 될 것 같다. 걸어온 시간만큼 무겁고 깊어진 삶에 대한 시선을 마주하며 내 시선의 깊이도 갖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
이지성.김종원 지음, 유별남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그 분의 책에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만큼 그의 글이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된 문장이기 때문이리라. 세계 3대 빈민 도시, 필리핀 톤도의 파롤라 마을에서 길어올린 희망의 꽃씨들. 쓰레기 마을이라 불리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너무나 해맑고 예뻤다. 가난과 무지에 갇히지 않고 그들의 피워올릴 미래의 꽃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주어진 삶을 비난하고 부정하지 않고 서로에게 체온을 나누며 희망을 갖는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응원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라 믿는다.

 

 

 

 

에세이들에 담겨진 삶의 짙은 여운들이 좋다. 그 진솔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곁에 두고, 희망을 어루만진다. 신간 에세이들을 살펴보면서, 그 책들의 부제와 내용들을 읽고 더듬으면서 마음에, 담으면서, 문득 내 안에서 덜어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본다.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 정작 끌어안아야 할 것은 끌어안지 못한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천천히 비워나갈 채비를 한다. 천천히, 그렇게 또, 12월이 가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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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에는 세 사람, 남편과 두 아이의 숨소리가 고요하고 따뜻하게 공기를우고 있다. 나는 아이의 장난감과 빨래 건조대, 옷장들로 정신없는 부엌방에 쪼그려 앉아 책과 노트북을 펼친다. 새벽 1시, 유일한 나의 시간. 무탈하게 하루를 지 시간의 끝에 이 책을 펼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하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위해 산 책. 『시옷의 세계다정한 작가님의 사인을 갖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리듯, 낯선 이의 체온을 갖고 싶.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땐, 시의 옷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상상도 했었는데 예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아 더없이 기뻤다. 내 마음이 아직은 열려있구나, 싶어서.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간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낭독한다. 행복하다.

 

며칠 째 떠나는 가을의 등을 떠미는 싸늘한 비가 쓸쓸하고 외롭게 내렸다. 아무와도 눈 마주치지도 못한 채 주룩주룩 흩어졌다.

그녀의 책, 그녀의 문장 위로 나를 포개면서, 일상과 감정을 포개면서, 고요한 정적 속에 이는 또 다른 시간의 물결을 느낀다. 좀처럼 아름다운 줄 몰랐던 시간도 떠나고 돌아보면 그리운 자리, 아련한 여운 같은 것임을 느낀다. 상처가 아문 자리를 더듬어 찾다가 상처를 받은 고통의 순간이 아닌, 그 상처를 견뎌내고 회복한 사랑의 순간을 떠올리며...

나의 이야기가 그녀의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한 시 구절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습을, 본다.

그러다 문득 손글씨를 꾹꾹 눌러 지나간 시간의 이름을 써보고, 다정히 불러도 본다. 사랑했으나 사랑으로 끝나지 않았던 이름도, 그림자처럼 바라본다. 부른다. 끊임없이 넘겨지는 삶의 페이지에 새로운 문장들이 쓰여지고 지워진다. 나를 웃고 울게 만드는, 그곳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다. 시인이 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 선물은 시옷의 낱말들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사람의 사랑이, 사랑의 상처가, 실은 그 선물이, 그리하여 사람의 삶이, 삶의 서글픔이, 그 서글픔이 종내는 한 줄의 시가 된다. 세상을 바꾸려는 손길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선이 되는. 그런 시에다 옷을 입히듯 나의 이야기를 입혀보았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과 사이좋게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 사귐, 이책을 건내며 중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해서, 이건 매우 시시한 사건에 불과하며 당연한 과정 그 사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런 일은 나에게도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임을 기억해냈다. 나에게 일어났던 작은 혜택들이 실은 은총이었으며, 그건 내가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기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중 하나일 뿐이라 여겼던 건 교만임을 아주 뒤늦게 알았다. 나에게 일어난 우연한 일들과 나를 여태껏 지탱해주었던 자잘한 행운들은, 내 믿음의 결과물이었다.

- 사소한 신비 중에서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나는 소원이 없다는 생각. 무언갈 희망하지 않고 꿈꾸지 않고 사는 삶의 지루함을 알면서도, 정작 나는 소원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도착하길 기다려야 할까.

음......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 내일은 눈이 올까, 비가 올까. 늘 고민만 많은 꿈꾸기는 어려운... 나는... 어른일까 어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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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 몬스터 섬의 비밀 3D - Friends : Naki on the Monster isla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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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상영


 

 

 

36개월, 어느 새 지호가 많이 자랐다.

오늘 극장을 다녀온 뒤에 더욱 그런 맘이 들었다.

 

지호와 함께하는 첫 극장 나들이. 선택한 영화는 프렌즈-몬스터 섬의 비밀!

집 가까이에 있는 상봉 메가박스로 전날 인터넷 예매한 조조영화였다.

어둠에 무서워하면 어쩌나, 지루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지호는 아주 의젓하게 첫 관람을 마쳤다.

좌석에 앉았을 때 나오는 광고를 보면서는 왜 영화가 시작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고,

간간히 가져간 음료를 마시며 좌석 옆에(여러 번 왔다간 아이처럼) 잘 꽂아두기도 했다.

에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진지했고 옆자리에 실례가 될만한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에니메이션 '프렌즈 -몬스터 섬의 비밀'

인간 섬의 두살아이 코타케가 사고로 몬스터 섬에 남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 섬에서는 몬스터들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영물로

물리쳐야 할 괴물로 본다. 그러나 두살아이 코타케의 눈엔 재미있고 자신을 예뻐해주는 존재일 뿐이다.

몬스터 섬의 버섯 점유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코타케를 맞게 된 몬스터 나키와 군조.

그들은 코타케와의 생활을 통해 곁에 없는 엄마에 대한 애정과 가족의 사랑을 채워나간다.

헤어짐과 시기 질투가 반복되는 사이로 서로를 생각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면서 감동어린 이야기를 완성한다.

 

 

 

#. 몬스터 섬의 친구들. 알록달록 저마다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 주인공. 귀염둥이 두살배기 코타케. 옹알옹알대면서도 할 말 다하던,  
요 작은 아이가 몬스터 나키와 군조를 들었다놓았다 한다.

 

 

#.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고 생각하는 나키와 군조.

이들의 우정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천진난만한 몬스터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서

겉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고 악한 쪽으로 폄하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아이들이 누려야 할 풍요로운 삶을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편견없이 조건없이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사랑하는 코타케와

 코타케를 그리워하는 몬스터 나키의 모습이 애틋하게 다가 온 애니메이션이었다.

 

뱃속에 있는, 8개월 된 축복이도 멈추지 않는 태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녀석도 이 애니메이션을 즐겼을 것 같은 느낌!^^

 

전체관람가의 영화였던 만큼 부모를 동반한 아이들 관객이 주를 이뤄 사뭇 소란스럽고 지속적인 웅성거림과 아이 울음소리가 계속 되었지만 어쩐지 오늘 만은 마음이 너그러웠다. 내 생애 가장 소란스러웠던 극장 관람이었지만, 그만큼 애틋했고 유쾌했던 시간이었다. 더빙도 리얼하게 잘 되어 있어서 거부감없이 어린 지호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지호는 잠들기 전, 오늘 가장 즐거웠던 일로 극장 관람을 꼽아주었다. 다음에 또 가야지, 하면서.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이의 마음에 이토록 기분 좋은 일로 남았다니, 무척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젠 자주 영화관을 찾게 될 것 같은 예감.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둘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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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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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도 누군가가 부러워 할 빛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책. 사람에게 시간만큼 공평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매일 똑같은 시간을 살아낸다고 생각하지만 그 끝에 놓인 마침표는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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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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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책. 가슴이 너무 뻐근하다. 첫 페이지의 글부터,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불안하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작은 아이를. 우연히, 시간의 급류에 휩쓸려, 어른들의 세계로 빠져버린 그 아이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책을 읽어 나갈수록 5학년 권아영은 지워지고,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으르렁거리는 인간의 모습만이 또렷히 드러날 때마다 섬뜩함을 느꼈다. 두려움을 지나 삶을 관조하고 무력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영에게 더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얼굴을 숨긴 권력이 그 작은 아이를 두고 분노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관한 실험을 하는 듯,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헌책방에서 죽음을 꿈꾸는' 그녀는 고통의 퍼레이드를 겪으며 늙고 노쇠해져가고 있었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애들이 알려줬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슈렉. 슈레기. 냄새나. 저리 꺼져. 아영은 하나같이 뾰족하고 냉랭하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그애들도 어느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된 걸까.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권아영이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초록색 괴물이라는 것을.
"나 게이는 처음 봐요."
"나도 너처럼 뻔뻔스러운 애는 처음 본다."
"근데 좀 다르네요. 만화에 나오는 거랑."
아저씨는 만화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과도 닮지 않았다.(중략) 그들은 쾌활하고 가볍고 자유로웠다. 아저씨처럼 무겁고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상대방과 마주 보는 눈이 따스하고 행복해 그들이 동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같은 게이라면서. 대꾸 없는 아저씨의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헐렁한 흰색 셔츠가 아저씨 등을 더 휑하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p.133~134, 「한뼘의 체온」 부분

 

헐값에 넘긴 책들이 넘쳐나는 곳. 그 책들이 위태롭게 이룬 기둥 사이에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두 사람이 있다. 둔한 체구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슈렉으로 불리며 놀림감이 된 아이 '아영'.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동성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남자 '두식'. 그들의 주변인물들은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 갈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앗아가려 달려들었다. 폭력으로, 윽박지름으로, 때론 회유와 동정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아영'과 '두식'. 자신들은 불완전하며 불길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늘 밑에 자신을 늘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으로 숨어들어온 아영과 헌책방으로 도망쳐온 두식이 하나의 공간을 나눠 쓰게 되면서 그들은 변화를 겪는다. 사람과 소통을 하는 일이, 서로를 걱정하며 일상의 체온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두식은 아영의 다리에 짓눌린 자신의 몸이 의외로 안정되기 시작하는 것에 놀란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쁜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p.159, 「안개」 부분 

 

그들은 썩어가는 두 개의 물 웅덩이였다. 어떤 파문도 일 줄 모른 체 그들에게 던지는 행인의 쓰레기를, 욕지거리를 품은 채 가만히 고여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에게 작은 파문이 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흐리지만 분명한, 희망의 문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잘 자리를 비켜주고, 아이의 옷가지와 간식을 사다주고, 목욕을 다녀올 돈을 넉넉히 쥐여준다. 아저씨의 일을 돕고, 어두운 안색을 살펴주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을 붙잡아 준다. 서로의 식사를 걱정하고 마주보며 밥을 먹는다. 두식은 아영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개 속으로  아이를 찾으러 나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준 성현을 뒤로한 채로. 또 아영은 두식이 자신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까봐 자리를 비켜준다. 뻔뻔하게 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황순구가 있는 거리로. 
사소한 배려가 섞인 행동들은 그들 안에 잠식해있던 '위안'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한 것.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타인이다. 그 망가진 삶을 다시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도 타인이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를  서로에게 지피며 지금 이 자리를 떠날 용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둠과 안개, 그림자의 삶 밖으로 나가기 위해 피워올린 불길이 헌책방이 있는 건물을 뒤덮었을 때, 아영이 황순구 때문에 겪어야했던 공포는 누군가에게로 전이되어 여전히 살아 꿈틀데고 있었다. 약자에 대한 집단 폭행, 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성을 놀이개로 삼고,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은 어제 오늘 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무섭게 자라나고, 사회는 점점 그 아이들을 제어하지 못한 채 휘둘리며 이글어져 가고 있는 현실. 기사화 된 일들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크고 작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현실. 네티즌이 일어서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들고, 몇몇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건은 소동으로 치부해버리는 참혹. 아영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아이들이 입을 열어 부모에게,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사회가 그 문제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주변에 서있는 사람으로써의 나는, 우리는, 스쳐지나는 그들의 사정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주어야 할텐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이름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슬프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배웅하듯, 따뜻하게. 더 이상 이곳을 서성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속으로 속으로만 그들에게 화이팅을 보낸다. 우리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길 순 있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들의 고통 앞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 밖으로 밀려나 현실과 부딪히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 까닭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작가는 왜 이 글을 써 나갔을까. 무수히 많은 두식과 아영 들이 가마 속에서 터져나가는, 슬픈 모습을 감내하면서. 아마도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꾸려진 고요해 보이는 현실에 가려져 스스로 사그라지는 영혼들을 환한 조명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저기 바쁘게 지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걸음 앞에 용기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이제 막 어둠 밖으로 나서 그들의 삶이 다시 어둠이 찾아 오기 전에 조금이나마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글을 나서며 문득,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겨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듯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가슴에 품어본다. 아영과 두식이 따뜻한 시선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면 싶은 바람. 오늘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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