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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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책. 가슴이 너무 뻐근하다. 첫 페이지의 글부터,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불안하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작은 아이를. 우연히, 시간의 급류에 휩쓸려, 어른들의 세계로 빠져버린 그 아이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책을 읽어 나갈수록 5학년 권아영은 지워지고,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으르렁거리는 인간의 모습만이 또렷히 드러날 때마다 섬뜩함을 느꼈다. 두려움을 지나 삶을 관조하고 무력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영에게 더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얼굴을 숨긴 권력이 그 작은 아이를 두고 분노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관한 실험을 하는 듯,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헌책방에서 죽음을 꿈꾸는' 그녀는 고통의 퍼레이드를 겪으며 늙고 노쇠해져가고 있었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애들이 알려줬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슈렉. 슈레기. 냄새나. 저리 꺼져. 아영은 하나같이 뾰족하고 냉랭하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그애들도 어느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된 걸까.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권아영이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초록색 괴물이라는 것을.
"나 게이는 처음 봐요."
"나도 너처럼 뻔뻔스러운 애는 처음 본다."
"근데 좀 다르네요. 만화에 나오는 거랑."
아저씨는 만화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과도 닮지 않았다.(중략) 그들은 쾌활하고 가볍고 자유로웠다. 아저씨처럼 무겁고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상대방과 마주 보는 눈이 따스하고 행복해 그들이 동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같은 게이라면서. 대꾸 없는 아저씨의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헐렁한 흰색 셔츠가 아저씨 등을 더 휑하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p.133~134, 「한뼘의 체온」 부분

 

헐값에 넘긴 책들이 넘쳐나는 곳. 그 책들이 위태롭게 이룬 기둥 사이에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두 사람이 있다. 둔한 체구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슈렉으로 불리며 놀림감이 된 아이 '아영'.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동성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남자 '두식'. 그들의 주변인물들은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 갈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앗아가려 달려들었다. 폭력으로, 윽박지름으로, 때론 회유와 동정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아영'과 '두식'. 자신들은 불완전하며 불길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늘 밑에 자신을 늘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으로 숨어들어온 아영과 헌책방으로 도망쳐온 두식이 하나의 공간을 나눠 쓰게 되면서 그들은 변화를 겪는다. 사람과 소통을 하는 일이, 서로를 걱정하며 일상의 체온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두식은 아영의 다리에 짓눌린 자신의 몸이 의외로 안정되기 시작하는 것에 놀란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쁜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p.159, 「안개」 부분 

 

그들은 썩어가는 두 개의 물 웅덩이였다. 어떤 파문도 일 줄 모른 체 그들에게 던지는 행인의 쓰레기를, 욕지거리를 품은 채 가만히 고여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에게 작은 파문이 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흐리지만 분명한, 희망의 문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잘 자리를 비켜주고, 아이의 옷가지와 간식을 사다주고, 목욕을 다녀올 돈을 넉넉히 쥐여준다. 아저씨의 일을 돕고, 어두운 안색을 살펴주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을 붙잡아 준다. 서로의 식사를 걱정하고 마주보며 밥을 먹는다. 두식은 아영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개 속으로  아이를 찾으러 나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준 성현을 뒤로한 채로. 또 아영은 두식이 자신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까봐 자리를 비켜준다. 뻔뻔하게 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황순구가 있는 거리로. 
사소한 배려가 섞인 행동들은 그들 안에 잠식해있던 '위안'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한 것.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타인이다. 그 망가진 삶을 다시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도 타인이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를  서로에게 지피며 지금 이 자리를 떠날 용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둠과 안개, 그림자의 삶 밖으로 나가기 위해 피워올린 불길이 헌책방이 있는 건물을 뒤덮었을 때, 아영이 황순구 때문에 겪어야했던 공포는 누군가에게로 전이되어 여전히 살아 꿈틀데고 있었다. 약자에 대한 집단 폭행, 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성을 놀이개로 삼고,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은 어제 오늘 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무섭게 자라나고, 사회는 점점 그 아이들을 제어하지 못한 채 휘둘리며 이글어져 가고 있는 현실. 기사화 된 일들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크고 작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현실. 네티즌이 일어서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들고, 몇몇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건은 소동으로 치부해버리는 참혹. 아영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아이들이 입을 열어 부모에게,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사회가 그 문제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주변에 서있는 사람으로써의 나는, 우리는, 스쳐지나는 그들의 사정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주어야 할텐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이름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슬프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배웅하듯, 따뜻하게. 더 이상 이곳을 서성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속으로 속으로만 그들에게 화이팅을 보낸다. 우리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길 순 있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들의 고통 앞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 밖으로 밀려나 현실과 부딪히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 까닭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작가는 왜 이 글을 써 나갔을까. 무수히 많은 두식과 아영 들이 가마 속에서 터져나가는, 슬픈 모습을 감내하면서. 아마도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꾸려진 고요해 보이는 현실에 가려져 스스로 사그라지는 영혼들을 환한 조명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저기 바쁘게 지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걸음 앞에 용기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이제 막 어둠 밖으로 나서 그들의 삶이 다시 어둠이 찾아 오기 전에 조금이나마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글을 나서며 문득,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겨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듯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가슴에 품어본다. 아영과 두식이 따뜻한 시선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면 싶은 바람. 오늘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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