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역습 -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두운 열정
라인하르트 할러 지음, 김희상 옮김 / 책사람집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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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명) 아주 사무치게 미워함. 또는 그런 마음.

사무치다 (동) 깊이 스며들어 멀리까지 미치다.


 미움은 자기검열의 대상이기에 끊임없이 숨기고 누르며 덮어놓는다. 꺼내고 싶지만 꺼낼 수 없는, 쌓이고 쌓여 가장 무겁고 묵은 내면의 짐이 된다. 어느새 스며들고 퍼져 형체도 없는 파괴력을 갖는다. 증오가 된다. 책을 읽으며 증오라는 감정이 나와 무관하지 않고 가깝게 느껴져 두려웠다. 증오의 사례들은 잔혹하며 증오가 증오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혹은 다른 대상이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상에 널린 부정적 감정을 연료로 자라나 사악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보이며 복잡한 공격성을 띤다. 우발적인 것이 아닌 은밀하고 치밀하게 표출되며 상대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근거 없는 비난을 행동의 정당성으로 삼는다.


증오는 간단하게 묘사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인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다. -p.18


 책은 그동안 범죄 혹은 정신질환과 연결되어 있던 증오의 감정을 분석하며 구체화시킨다. 증오의 탄생과 뿌리, 진실과 특징, 그와 이웃한 공격적 정서들과 사랑과 증오의 부조화인 애증. 뿐만 아니라 증오와 혐오가 확산되며 소셜 미디어 혐오 댓글과 정치적 선동에 악용되는 현재까지. 어느새 사람 사이에 만연한 얼굴 없는 증오들은 관계의 단절과 개인을 고립을 가져와 삶의 무력감을 유발한다. 이로써 새로운 증오가 계속 탄생한다. 저자는 이 고리를 끊기 위해 증오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고자 한다. 실체를 알아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오를 비난과 한탄의 대상으로 삼기보단 서로를 파괴하는 증오를 멈추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잔인하고 격정적이며 냉혹하다 할지라도 증오는 일상의 사소함에서 시작된다. -p.53


 증오는 '무력감'으로 오며 '의지, 갈망, 열심, 결심 같은 중요한 심리적 동기가 틀어막히면' 발생한다. '증오는 긍정적 반응의 결여로 인한 실망으로 촉발'된다.


부모의 미소나 가족의 격려처럼 애정이 담긴 관심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부드러운 힘이다. 인정과 격려,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교육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 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육 현장은 이런 따뜻함에 인색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호 존중과 품격 있는 만남이 중요하다. 인간은 평생 누군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고 믿어 주기를 갈망한다. 간단히 말해서 핵심은 언제나 사랑이다. -p.54


 감정의 굶주림을 느낄 때 사람은 공격성을 드러낸다. 감정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서 무력감에 사로잡혀 이런 상황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상대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증오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p.56) 어쩌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랑받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증오마저도.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들이 품은 칼날이 증오라는 생각에 슬펐다. 증오 범죄와 자기혐오, 디지털 분노로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에서 맞닥뜨리는 건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확인하고 처벌에 혈안이 된 또 다른 증오다. 증오 범죄는 결코 타협될 수 없지만 그 이면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숨어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증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증오를 인정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증오와 마주 서야 한다. 그것이 파괴력을 갖기 전에 침묵 밖으로 꺼내고 응대하며 공감해야 한다. 이는 마지막 두 챕터, 증오 극복 10단계, 증오로 얼룩져 가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법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소통을 통해서만 상대의 생각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상대는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전체 면모에서 파악되는 한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p.257


 '무시하고 외면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는 증오를 끌어안고 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은 외면할수록 힘을 갖는다. 속 끓이며 삭이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오직 공감 앞에서 증오는 목표와 의미를 잃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심리와 사회적 원인을 함께 고려하며 증오를 맞이하려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한다. 개인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개인과 개인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서로에게 일방적인 공감을 강요하는 일이 되어선 안된다. 다양한 개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하는 공동체로 소통하며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개인의 가치를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해선 또 다른 개인이 함께 있어야 한다. 증오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이 그 우위에 서는 듯하지만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또 다른 증오가 될 뿐이다.


살아있는 시한폭탄이 될 것인가. 

사랑이 될 것인가.


 이 괴리가 큰 만큼 감정에겐 인간을 그러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애쓰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판단하지 않는 관심과 공감. 서로에게 필요한 건 존중과 배려다. 혐오와 증오를 멈추는 것이 강력한 제재와 힘이 아닌 따뜻한 관심과 공감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스스로에게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의 감정을 적절히 꺼내 표현하고 흘려보낼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증오에 대한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주 작은 일상 속 감정의 씨앗으로 태어나 불꽃이 되어 사그라지는 한 사람을 알게 된 듯 느껴진다. 누구나의 마음 안에 크고 작게 존재하는 증오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게 되어 안심이 되는 한 편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그 모든 것 아래 사랑이 있음을 나는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언제나 용서와 평화를 선택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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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사춘기 마음을 부탁해 - 청소년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는 쓰담쓰담 그림책 상담실
남기숙 지음 / 상도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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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나를 붙들어 준 그림책을 기억한다. 집 앞 도서관에서 열린 동화구연 수업에서였다. 누군가 나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을 들은 경험이었다. 앞에 선 선생님이 동화책을 넘기며 읽어주시는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가슴이 몽글몽글 벅찼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눈을 맞추며 가만가만 책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그 순간, 위로와 감동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뒤로 나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마음이 달라졌던 것도. 그렇게 동화구연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도서관에서 동화구연 봉사를 하게 되었고, 도민 강사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보육교사가 되었다. 내향적인 나의 미래에 있어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길이었다. 따뜻한 어른과 그림책으로 연결되어 내가 달라지게 된 그날, 내 안에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그날을 지금도 떠올리며 아이들을 만나고 나를 돌아본다.


아무리 우울한 순간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입니다. 《어두운 겨울밤에》는 작가 플로라 맥도넬 자신이 우울증을 겪었던 경험을 담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깊고 깊은 겨울밤을 지나 탄생한 이 그림책 자체가 바로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요? -p.106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은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림책을 통해 받은 위로와 용기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면서,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나를 더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충만하고 행복하지 않은 채로 아이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됐다.

 내 아이를 위한 독서였는데 자꾸만 내가 떠올랐다. 마흔이 넘어 이제야 나를 만난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민들을 아이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 나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고민들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은 나와 달리 성인이 되기 전에 답을 찾게 될까.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안쓰럽고 뭉클하고 대견하다. 


 사춘기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육아서가 부담스럽고 어려운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다른 아이들의 고민을 통해 내 아이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과 더불어 나의 유년을 떠올리게 되고, 책 속 질문에 답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를 이해하고 돌보는 부모가 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돌봄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가 채워주는 돌봄은 나이가 들수록 어렵고, 어릴 때 충분히 받고 자라는 일도 드물다. 그러니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충분하게,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돌봄을 나에게 먼저 해내야 한다.


인생에서 두려운 것이 어디 시험뿐일까요.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또 새로운 두려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 거예요. 사자로부터 벗어난 파랑 아이가 이번에는 곰과 마주쳤듯이 말이지요. 어쩌면 인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두려움을 만나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단지 높은 시험 점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p.80


 아이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학업만큼 삶의 고민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힘이 든다.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업으로, 시간이 없어서 불편한 마음을 피하고 미룬다. 아이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알고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불편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과 마음을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 마음이 아프기 전에 이러한 힘과 마음을 다져가는 과정이, 연습이,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어른과 함께. 비난과 질책이 아닌 긍정의 말과 응원으로 좋은 질문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 아이들 곁에 좋은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그림책을 읽는다.


 사람을 바꾸는 말은 어렵고 멋진 말이 아니다. 익숙하지만 사려 깊고 따뜻한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림책에 쓰인 언어들이 그렇다. 짧지만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고 뻐근한 그 자리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거기엔 외면했던 감정들, 우리가 품어야 할 진짜 모습이 있다. 그림책은 읽고 즐기는 일을 넘어 각자의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내보이게 한다. 아이와 부모,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혀 서로의 마음을 마주 보게 한다.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 마음이 어려워 망설이게 된다면 이 책이, 돋보기쌤의 이야기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오래 담고 싶은 문장 발견했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 그 표현을 보는 순간 그래 이거야, 하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지향하는 삶. 혼자만의 작은 모험 안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실행으로 채워진 이야기를 갖는 것. 그 과정을 음미하고 숙려하는 것. 파랑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 대신 차오르던 기대감(p.78)처럼 말이다. 오래전 나를 위해 샀던 『그림책으로 쓰담쓰담』 그리고 『그림책, 사춘기 마음을 부탁해』까지. 꼭 필요한 어른의 목소리로 질문과 응원이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이야기 나누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어른 쪽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을 마치고 아가타는 다시 캠핑장으로 향합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아가타는 아이들과 어울려 모닥불 앞에 앉습니다.

그 자리가 자신에게 딱 맞게 느껴집니다.

산의 환한 웃음을 마음에 품은 채 아가타는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산속 캠핑장의 밤은 깊어 갑니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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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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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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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다. -p.15


 강릉으로 여행을 왔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보고 싶은 책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피융 파바바바바방! 어둠이 덮인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한다. 허공으로 쏘아진 불꽃이 한순간 강렬한 빛과 소리로 부서진다. 사람들의 와, 하는 소리. 행인의 시선이 그곳에 모였다 흩어진다. 모자로 보이는 일행은 노부인을 바다 앞에 세워두고 멀찍이 뛰어와 사진을 찍는다. 어서 보여주고 싶은 뒷모습으로 모래 위를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아이 같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하나의 담요를 덮은 두 사람이 거기 있고. 또 고개를 들면 혼자 걷는 이가 있고. 다시 고개를 들면 아무도 없다. 순간 그 장면들이 불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책에서도 그런 불꽃을 보았다. 작가의 이야기,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가 그들에게 건넨 말과 그렇게 나에게로 온 문장들.


 그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누구보다 밝고 진지한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털썩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무방비한 슬픔의 해제가 그녀의 무기였다. 오히려 그녀를 단단하게 만드는 유연함. 그녀의 춤을 닮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객들을 대하자 일이 즐거워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고된 삶을 견뎌내게 할 의지다.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다. -P.37


 항상 시간은 모자라고 조급함과 조바심에 몸이 달았다. 늘 종종거리며 지내는데 남는 것은 없는 하루. 허무하고 무력했다. 자주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쫓느라 애썼다. 애써 가진 것들을 내팽개쳐 두고 나에게 없는 것들을 찾아 헤매며 시간을 소진했다. 나는 이 삶에 무얼 기대하며 사는 걸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당신에겐 큰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 무시무시한 모호함들로 삶은 점점 어렵기만 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마주한다. 그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울다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장애인 시위에 대해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고, 샌드위치도 꿈이 될 수 있다는 것과(「당신의 꿈은 샌드위치」) 선한 마음도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정지된 도시」)에 대해 생각했다. 서슴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상처를 주다 부둥켜안는 모녀를 보면서는 늘 조심하기만 했던 엄마와 나의 관계도 생각나고. 나도 부모님이 오지 않은 졸업식에서 내가 그들에게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싶었던 적이 있다. 나는 두려웠다. 두려워서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서운함보다 부모가 된 마음으로 작가님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리웠을지.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딸에서 엄마로, 다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문장 사이에 그녀가 뛰어넘은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들을 가늠하며 글로 뛰어넘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곧 잃어버릴 세상이어서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p.123


 하루하루를 태워 만들어내는 불꽃들. 불꽃은 타올라 소진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고 아름답다. 우리는 그러한 소멸을 꽃이라 부른다. 그녀의 꽃을 통해 내 삶의 꽃을 본다. 내 주변의 꽃을 본다. 저마다 스스로를 태우며 다른 색깔로 함께하기에 알록달록 무늬가 되는 그 우연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알면서도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여전히 해주기 어려운 말. 모질게 지적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세상이 무심코 던지는 말들 앞에 우산을 들고 설 수 있는 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건 딱 그만큼의 힘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 것을 지키며 버텨낼 수 있는 힘. 그 우산 아래 누군가를 들여놓을 수 있는 힘.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붙잡지 않고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나로 설 수 있는 것. 그것을 위해 매일을 버틴다. 지랄맞은 나날이 나를 키운다고 생각하면서. 지랄맞은 나날을 시원하게 태워 불꽃으로 완성시키는 기쁨을 떠올리면서.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영원이다.


 보이지 않아도 보고 싶은 욕망은 있다.

 들리지 않아도 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걸을 수 없어도 뛰고 싶은 마음은 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비록 제한적인 감각이라 해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으며 낯선 바람을 느낄 수도 있다.

 -p.50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장애가 있지만 음악중심 무대에 서고, 드라마에 나오고, 여행지에서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삶이 우리와 가까워져 아무 경계 없이 이름을 부르고 함께 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나의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나조차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모른다는 말이 부끄럽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견뎌야 하는 편견과 이 사회가 배려하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늘 걸어 다니던 길이 휠체어로는 다니기 어려운 길이라는 걸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며 알게 되었으니까. 세상은 불편한 사람을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상은 어디 그런가. 공평하다고 하면서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필요한 도움은 스스로 구해야 하며 그마저도 돈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글에도 나와 있지만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알지 못해 볼 수 없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그 앞에 넙죽 엎드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루하루가 쌓여 이르게 될 그녀의 축제를 응원한다. 내 안에 터지는 폭죽과 그 소멸을, 기쁘게 끌어안는 용기를 알게 한 그녀의 문장 앞에 이 글을 꽃다발처럼 내려놓고 싶다. 당신이 애써 살아내고 있는 지랄맞은 하루하루를 나도 웃으며 건너볼 마음이 생겼다고. 알게 되어 반갑고 고맙다고. 오늘 하루는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란다고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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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세 번, 동네문화센터에 놀러 갑니다
정경아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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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통일법 시행으로 두 번째 마흔을 산다. 두 번째니까 조금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마흔은 아직도 내게 먼 이야기인 듯하다. 요즘 고민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나를 붙드는 일. 내게 부여된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나를 챙기는 일은 뒤로 미뤄왔다.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좋은 사람이기 위해 참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버겁고 두렵기까지 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른 이들만 챙기며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은 억울함이 되고 서운함이 되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애써 살아온 시간을 내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남만을 위해 살았다 생각하며 자책했다. 전과 달리 살고 싶은 마음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지금도 그 과정 속에서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그런 나라서 다른 이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갖고 그들의 기술을 내게도 적용해 보려 한다. 두 번째 스무 살을 사는 내가 세 번째 서른에 접어든 이이의 글을 반갑게 읽게 된 이유다. 무엇보다 책 표지에 인생의 절전모드를 켜고 느슨하고 자유롭게 단순하고 호쾌하게,라는 말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금 내가 바라는, 내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힘을 빼는 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따뜻한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내가 나에게 가장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스트레스인 줄 모르고 마음이 약해서라고 나를 탓했다. 그런 내게 저자의 문장은 따뜻한 다독임이었다.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들, 그 앞에 몸에 들어갔던 힘을 스르르 내려놓는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날을 세는 지혜는 없다. 그렇더라도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갈지 궁리할 수는 있다. 잘 살아낸 하루하루가 행복한 잠으로 이어지듯이, 하루하루 잘 걷다 보면 마침내 해피엔딩에 이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 욕심껏 연연하면서, 게으르게, 제멋대로 살아봐야겠다.

너무 훌륭하지 않기. 후회나 자아 성찰도 너무 많이 하지 않기. 왜냐고?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어느 누구도 지나간 일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저지른 잘못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p.216


"60년을 살고 났더니 이젠 모든 게 좀 담담해. 가족들이 너무 사랑스럽지도 너무 밉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사랑하게 되더라. 어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데 난 절대 아니야. 다시 그 난리 블루스를 벌여야 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 젊은 건 한 번이면 족해."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p.98


 전과 달리 살기 위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많은 책은 나 같은 사람에게 착한 사람 증후군이다, 못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이어야 한다, 거절의 필요성 등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본래 모습은 나타났고 다짐한 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이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우울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나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나의 관성. 남보다 내가 불편한 게 낫고 나만 좋은 결정보단 나도 남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라고 고민했다. 그렇게 하고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바라보지 못했다. 항상 내 몫을 챙기지 못했다 책망만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나를 발휘하는 것. 새로움을 만나며 가슴 뛰고 설레는 것. 무엇보다 그 모든 것 앞에 비장해지지 않기. 훌륭해지려 하지 않기. 즐거운 마음으로 지속하기. 저자의 글 속에서 따뜻한 단어들을 품는다. 삶은 유한하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모호한 것들을 쫓느라 늘 허덕이며 힘을 뺐다. 힘이 모자라니 여유가 없고 나를 몰아붙이며 하루하루를 종종거렸다. 무엇을 하면서도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편할 날이 없었다. 버티기가 가능했던 것들이 (나이 때문인지) 버거워지면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아가려 해도 나아가지 않는 몸과 마음.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여유를 찾고 주변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배려의 마음은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님을. 나에겐 그런 에너지가 있었고, 그렇게 한 뒤에야 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점점 내가 달라지고 있는데 버틸 수 있는 경계, 한계를 움직이지 못하니 무너지며 지쳐가게 된 거고. 하지만 이제는 나의 경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적당하게 타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겠다. 나를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건 나니까. 나여야 하니까. 혼자서도 행복한 내가 되기로 한다.


마음속에 새로움이 결핍될 때 인간은 늙고 낡아가는지도 모른다. 배움은 부족해진 새로움을 채워 넣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p.89


 아이가 처음 유치원에 가고 혼자가 되었을 때 막막한 시간을 달래준 건 도서관에서의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육아를 시작한 뒤 멀어졌던 내 이름을 10년 만에 덜덜 떨며 말해 보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긴장하고 설레고 위로받았던 순간들. 그 시간을 시작으로 멈춘 듯했던 내 삶의 시간이 조금씩 움직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안간힘으로 살았다. 무심코 돌아보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간 듯 허무한 날들이었는데 이렇게 누군가의 삶 속에서 불쑥 내 삶을, 안간힘을 쓰던 나를 마주하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모두는 같은 시간 위에서 저마다의 걸음으로 시간을 살아내며 비슷한 고민들로 힘들고 넘어지고 아파하는 것 같다. 오늘의 하루를 적당히 느슨하고 괜찮은, 나다운 나날로 보내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만나면서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이렇게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으셨을까 싶고. 그 시간이 멋진 한 권이 되어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다정한 말로 건너오니 너무나 멋진 일이다 싶다. 언제 나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 존재를 잃어버린 허무한 마음과 함께, 노년에 올 수도 있고. 소중한 가족이 떠난 후나 아이가 다 커버린 듯 느껴지는 어느 날, 혹은 직장을 그만둔 뒤에 찾아올 수도 있고... 언제, 어느 순간에 맞닥뜨릴지 모를 당혹감이며 불안이고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기회로 만들려면 준비가 되어야겠다. 내가 비장해지지 않고 이 삶과 적당하고 느슨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어야겠다.

 출산율이 줄어 노인 부양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는 미래가 오고 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청년기를 열심히 살았고 노년기에 이르러 새로움을 채우며 지혜를 도모하는 모습에 이 또한 또 다른 사회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부양되어야 할 분들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대이며 지혜를 더할 어른인 것이다. 이러한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게 되었다. 세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일. 그렇게 함께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의미가 결코 생산, 재화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명 한 명의 생애가 서로의 삶에 뼈대가 된다. 어떤 시간을 살든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 저마다의 새로움으로 뻗어가길, '굳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고 적당히 게을러도 괜찮은 날들'을 누리길, 마지막까지 이 삶을 온전히 살았다 쓰여지는 이야기가 많이 많이 들려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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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 허수경 시선집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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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는 기쁨 너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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