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국’‘나라’, 각각의 뜻을 설명하라고 할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봉주의 질문 앞에 선뜻 입을 땔 수 없었다.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니 같은 뜻일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본 ‘조국’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은 지금은, 설명할 수 있다. ‘조국’과 ‘나라’의 다른 뜻을. 조국이란 말이 갖고 있는 향수와 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봉주르, 뚜르』에는 5학년 봉주가 프랑스란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돌아보고, 그리워하며,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는 탐정소설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고,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게 한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엔 우리가 살면서 놓치고 지나온 역사과 과오, 그리고 남겨진 과제에 눈뜨게 한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한다’



낯선 땅 프랑스 뚜르에 새 보금자리를 튼 봉주네 가족. 그곳에서 봉주는 특별한 문장을 발견한다. 한글로 쓰인 두 개의 간절한 문장. 봉주는 그 문장의 주인을 찾으려한다. 그가 무사히 살아있는지,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갔는지 혹여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주네 가족이 이사 온 집에는 한국인은 산 적이 없다고 하고, 집과 관련된 주변 사람 누구도 쉽게 실마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 봉주는 처음으로 가슴깊이
‘조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책에서 본 한국의 역사 인물들과 나라, 가족에 대해서도. 

 세계는 더 이상 넓지 않다. 비행기를 타고 하루만에도 해외를 다녀오고, 거기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도 잦다. 또 한국 안에서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쉽게 잊게 되는 것이 바로 자국(自國)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나의 나라를 갖고 있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잊어버리고 우리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생활 모습들을 동경하며 산다.
 낯선 땅에서 발견한 한글로 쓰인 문장으로부터 발현되는 봉주의 이야기는 나의 나라를 갖고 있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한다. 또 타인의 나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얼굴색과 머리색, 모습이 다른 것이 생각과 감정 또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뚜르로 이사한 뒤 등교하기 시작한 학교에서 봉주와 늘 부딪히기만 했던 ‘토시’ 수수께끼 같은 아이였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소개한, 무뚝뚝하고 표정 없던 아이. 봉주는 처음부터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토시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수영도 달리기도 토시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발표수업에서 봉주는 한국을 소개하게 되고, 거기서 토시와 작은 다툼을 하게 된다. 한국이 분단국가임을 아는 타국의 아이가 던진 질문에 봉주는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기본 정보로 대답을 해준다. 가난한 나라라는 것과 독재자로 인해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게 살고 있다는 것. 그 때 토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봉주에게 반문한다. “네가 북한을 어떻게 알아?”라고…… 토시는 분명히 봉주의 대답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던진다.


 “넌 네가 북한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토시는 가볍게 말하고 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정말 화가 났다.

 “내가 북한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뭐가 사실인데? 왜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데?” 

 “화낼 거 없어. 난 네가 너희 나라에 대해서 다른 아이들한테 정확히
알려 주길 바랐을 뿐이야. 그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일본인인 토시가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는지, 그 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우리나라에 관심이 있어 북한을 좀 더 알고 있거나 어쩌면 남한이 가난한 북한을 돕는다는 봉주의 말이 자국만을 자랑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들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토시의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이 들긴 했다. 북한에 대해 너무 빈곤과 무지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북한은 그들 나름대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봉주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서 먹먹한 마음을 갖는다. 한 나라였지만 서로 땅을 가르고 점점 다른 문화와 모습을 갖추어가면서 어떤 타국보다도 먼 나라가 된 느낌이다. 북한은 가난하고, 그래서 북한사람은 프랑스로 오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핵무기 개발로 다른 나라로부터 비난을 사고 있는 북한. 가난한 북한사람들은 매일 굶어 죽어간다…… 
 토시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한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봉주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으면서도 아는 척 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그렇게 뚜르로 와서 일본인으로 식당을 운영하게 된 가족의 이유를 토시가 한마디, 한마디 꺼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덜컹거렸다. 현재 북한의 3대 세습은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는 없고 권력만이 세습되고, 난무했던 결정. 국민을 외면한 정부의 오만. 뉴스가 요란하게 북한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토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떠나온 자신의 나라를 부끄러워하기 보단 북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 그 아이의 마음이 깊이 가슴에 울렸다. 나는 북한의 결정 앞에 어떤 비난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 그건 어떤 것일까?

“북한에 대해서 찾아봤어요. 제가 혹시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되면 어때요?”
엄마 아빠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되는 게 안 될 건 없는데, 북한 아이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지. 물론 요즘 한국에는 탈북자들이 많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빠가 대답했다.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그게 위험한 일이에요?”

 사실 분단만 아니었다면 그저 다른 지역에 사는 또래의 아이가 만나 어울리게 된 것일 뿐인데 전쟁의 상처로 인해 자신을 숨기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나야 하는 토시와 봉주의 현실이 못내 서글펐다. 봉주의 창을 때리던 토시의 돌맹이가, 둘이 숨어든 공원의 어둠이 그런 두 아이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비췄다.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비밀을 얘기해 준 토시와 친구가 되면서 봉주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마음이 한 뼘 성장했다. 서로를 기다리는 애틋한 친구가 된 봉주와 토시의 모습에 진한 감동이 일었다.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예쁘지 않은가. 의심과 미움을 버리고 만난 아이들은 정말, 천진난만했고 예뻤다. 어린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서로에 대한 걱정과 우정이 따뜻했다. 그래서 계속 이어질 수 없었던 두 아이의 마음에 안타까움은 너무 크게 일었다. 

 전쟁세대와 멀어질수록 우리는 역사를 잊어가고 있다. 교과서 속 외우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사고들로만 치부하며 외면한다. 우리의 ‘역사’를 잊는다는 것은 나라의 뿌리를 잃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의무는 분명 지금의 어른들에게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봉주르, 뚜르’ 속에는 꼭 집어 역사라 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사건도 없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에는 ‘조국’‘나라’, ‘나의 가족’, 그리고 ‘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낯설지만 깊이 공감되는 단어들이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역사를 선과 악으로 결정지어놓은 책으로 아이의 생각을 미리 닫아버리기 보단 열린 마음으로 역사에 대해, 나의 조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역사를 새기고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누구의 가슴에나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재미로 읽고 덮어도, 마음 한쪽에 들어찬 묵직한 무엇을 느끼며 책을 덮어도 한순간 느꼈던 따뜻함은 오래 남을 것이다. 문장의 주인이 드러나고 이야기는 결말을 맺지만 어쩐지 아직 비밀은 풀리지 않은 느낌이 든다. 가슴 속엔 아직 풀리지 못한 물음표들이 떠다닌다. 그 생각의 고리들에 하나씩 답을 달고 나면 아이도 나도, 불쑥, 다르게 느껴지는 오늘을 경험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책들이 너무 많다. 손으로 더듬으며 읽고 싶고, 그 문장들 한올한올에 위로 받고 싶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들임에도 벌써부터 마음이 떨린다. 빳빳한 책의 첫장을 열며 갖는 기대감과 이제 열린 문틈으로 본 첫 문장이 가져오는 떨림은 앞으로무수한 페이지를 넘기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감정들의 골을 예감하게 한다. 내가 익는다. 책으로 인해,  내가 두둑해지고 내 안에 새 페이지가 열린다. 까맣게 글짜들이 박힌다. 

 

제1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문학동네작가상엔 젊은 작가들의 시선이 톡톡튄다. '사라다 햄버튼'이라는 고양이와 '나'의 동거.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변화하는 삶의 시선 같은 것을 만나고 깊이 공감하고 싶다.  

재미있게, 읽을 준비가 되어있다. :)  

  

- 8,100원

 

 

 

공선옥 작가님 만의 따뜻한 문체. 그 속에서 위로 받고 싶다. 추운 겨울 품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불러보는 그 이름 만으로도 따뜻해질 것 같은. 사랑도 사람도 그리운 지금... 작가님의 신작, 꼭 만나고 싶다. 

 

 - 9.900원 

 

 

 

나희덕 시인의 시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변의 것들이 환하게 눈에 들어오고  

곁에있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체온이, 잡을 수 있는 손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를 알게 해 준다. 언젠가 빌려 읽고 오래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책. 요즘 자꾸 다시 생각나는 이 책. 꼭 만나고 싶다. 

 

 - 5,250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사랑을 믿다'를 본 후로 만나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모인 소설집이다. 많은 분들이 가만히 곱씹을수록 그 문장의 깊이가 되살아나고 마음에 공감이 인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다른 분들의 서평을 읽고 꼭 읽어야겠다고 더욱 마음을 굳힌 책.  

 

 - 9.000원 

 

 

조경란 작가의 팬이다. 정말, '혀'를 읽고 나서 더욱, '풍선을 샀어'를 읽고 나서 더더욱 그녀의 섬세함과 깊이 있는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복어'는 작가가 오래 쓰지 못했던 글을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작가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될 작품이라고도 했고.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여자에게서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와 '복어'라는 제목이 주는 강렬함이 어떻게 버무려져 담겨있을지 기대되는 작품이다.  

 

- 9,900원

 

  

 

   윤성희 작가는 단편집 '감기'를 만난 뒤 처음 만나는 작품이다. 아기 엄마여서 연재되는 당시엔 잘 읽지 못했다. 윤성희 작가의 문장이 주는 편안함은 잊지 못한다. 단편소설에서 느낀 작가의 깊은 시선들이 장편소설에서는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를 스쳐간 모든 인연들을 돌아보게 할 책. 구경꾼들. 나의 가족과 내 주변을 사랑하게 해 줄 책, 내가 이 지구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이라 생각하게 해 줄 책이라 믿는다.  

 

 - 9,000원

 

 

<총 51,150원> 

쓰다보면 어느새 이 책들은 내 곁에 와 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지금, 지독한 감기 곁에서 벗어나고 싶은 지금, 

이 여성작가들의 문장으로 위로받고 싶다.  

읽고 난 뒤에 더 많은 이야기들을 여기에 남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바구니 옆에 끼고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다보니 어느새 새벽이다. 책을 고르고 펼쳐보면서 가슴 설레였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책 한 권과 커피 한 잔이면 행복하던 시간을 다시 되찾은 기분이었다. 이 가을, 많은 책들을 읽고 잃었던 꿈들을 되찾고 싶다. 마음에 가득 활자들을 채우고 그 풍요로움으로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다. 이 달 말일은 나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다. 가사일로, 아이를 키우며 잠시 멀어졌던 책. 그러나 여전히 내 곁에서 나의 꿈이고, 위로가 되는 책. 그 때의 기억들이 마음에 담은 책과 함께 행복한 미소를 준다. 제 장바구니를 꼭 들어 주시길, 소원하며.

 

여전히, 그리고 끝없이 사랑받을 책. <1Q84 1,2,3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기점으로 변하였으며, 분명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멈추기 어려운 흡인력과 속도감, 그리고 특별한 이야기가 두 개의 달이 뜨는 그곳을 향한 꿈을 꾸게 한다.  

아직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깊이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써는 많은 사람들의 추천과 끝이지 않는 리뷰들을 읽으면서도 선뜻 그의 소설을 시작하기가 망설여졌다. 도서관 내 그의 책의 서가 자리는 늘 비어있으며 나는 언론과 다른 독자들의 이야기로 그를 만나야 했다. 물론, 아줌마인 현실이 이 세 권의 책 앞에 망설임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기회에 이 책을 꼭 품에 안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조경란 작가의 신작. <복어> 제목과 표지가 주는 느낌부터가 강렬하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죽음. 사랑. 이별. 두려움. 인간의 감정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뻗어나갈 그녀의 특별한 이야기를 꼭 만나고 싶다. <혀>를 통해 느꼈던 인간 감정의 극단과 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그 자리를 지키는 관계들의 섬뜩함이 이 책 안에도 분명 강한 긴장감을 품고 존재하리라 기대한다. 조경란 작가가 15년 작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지칭한 이 작품을 이 가을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만들어보고 싶다. 

 

  

 

< 총 금액 :  50,760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손으로 들고 읽을 수 있는 작은 무게의 책이다. 그러나 심심한 맘에 섣불리 이 책을 펼쳤다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는 마음의 무게에 곤욕스러워질 것이다. 두 번째로 만난 헤르타 뮐러의 책. 그녀의 문장은 막힘없이 흘러가는 작은 구슬처럼 여유롭고 또 아름답지만, 그 문장들이 늘어서서 뿜어내는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는 처절하고 묵직하기만 하다. <숨그네>의 레오에게서 삶 자체를 착취당한 자의 비애를 보았다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의 빈디시에게선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선택할 수 없는 내일 앞에 발만 구르는, 무능력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전쟁 후, 전몰자 기념비 주변에 핀 ‘장미’는 아름답지만 연약한 ‘풀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는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권력은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억압하고 마음대로 오려내었다.
  ‘빈디시’는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기 위해 2년 째 이장에게 밀가루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기약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다. ‘모피가공사’는 이미 여권을 받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고, ‘야간경비원’은 떠날 생각이 없다. 떠나려는 자와 떠나는 자, 남으려는 자가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빈디시의 내면을 헤집는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것에서 ‘멈춰선 시간’을 본다. 벗어나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선 희망도 내일도 없다. 끝이 난 것이다. 바퀴를 잃고 멈춰 선 수레가 길가에 버려진 자신의 큰 덩치를 수치스러워하듯, 빈디시는 남아있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했고 여권을 얻지 못한다면 생은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의 마을엔 생기 있는 것도, 빛나는 것도, 오고가는 미소도 없었다. 안개가 낀 듯 경계가 흐릿한 그곳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죽음의 냄새였다. 흡사 죽은 자들이 사는 내세 같기도 했다. 살아서 먹고, 움직이고, 이야기하지만 시간의 목줄에 이끌려 하루를 지나칠 뿐, 누구도 그 목줄을 팽팽히 당겨 살아내는 이는 없었다. ‘관’은 이름표를 달고 그들의 곁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은 친근하게 맴돌았고,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떠나는 이를 배웅했다. 뮐러의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루마니아를 알았고, 그곳에 있었던 전쟁과 비극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쉬쉬하며 숨겨야 했던 역사와 감시당해야만 했던 삶의 고단함이 절실히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갇혀 마음에 깊은 감옥을 지어야 했던 슈바벤 독일 마을 사람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온전히 자신을 누일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마을은 생활의 터전도 안식처도 아닌 ‘작은 수용소’ 같았다. 사람들의 재산과 노동, 곡식 등의 것들이 어떤 대가도 없이 정부에게 넘겨졌다. 열리지 않은 곡식과 열매마저도 그들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훔쳐보았고, 눈길로 조롱했다.


빈디시는 바짓가랑이에 한 손을 올려놓는다. 손은 차갑고, 허벅지는 따뜻하다. “여기 사정은 점점 나빠질 거야.” 빈디시는 말한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뺏어갈걸.” - p.111

 

 그런 마을의 사정에도 떠나지 않으려는 야간경비원을 빈디시는 우둔하게 여겼다. 누가 옳은 것일까.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빈디시는 살기 위해 지금의 아내에게 삶을 붙들어 매었다. 전쟁 후 남은 자들에게 사랑의 몸짓은 교환의 가치였고, 쾌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그것은 인간의 욕심과 분노로만 그들 곁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빵이었고, 옷이었고, 여권일 뿐이었다. 아내는 빈디시를 만나기 전, 러시아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남자들의 철제침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빈디시는 그 때의 아내를 두고두고 이해하지 못했다. 본문 중「풀수프」에서 그녀의 과거를 자세히 만날 수 있다.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한 여자의 잔인하고 고단했던 시간이, 굶주림 앞에 무릎 꿇은 그녀의 마음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섣불리 그녀의 판단을 비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카타리나를 미워할 수 없었다. 
  처음에 빈디시는 어서 빨리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고 싶었음에도, 도를 넘는 부정된 방법을 쓰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결국 딸아이의 몸을 내어주고 만다. 도시에서 유치원교사로 일하는 아말리에는 부모를 원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화장을 한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하얀 구두를 신는다. 빈디시는 말리지 못하고 망부석이 되고 만 자신을 끝없이 자책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딸아이가 돌아올 길을 내다보면서 끝없이 길을 잃었다. 그들의 모든 감정과 판단은 여권에 묶여있었다. 어쩌면 목숨도. 그들은 그 줄을 끊지 못했다. 
  힘을 가진 자들은 그늘에 숨어 약한 자를 탐하고, 제복과 수도복으로 죄를 가리고 있었다. 손도 데지 않고 약한 자를 쥐락펴락했다. 사람들은 권력으로 무장한 그들을 우러러 보면서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그렇게 그림자만 남은 그들을 삼켰다. 표정도, 입술도, 재산도, 가족도, 내일도 모두 삼켰다. 명명하여 부르기 이전에 그들은 한 개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그 윤곽마저 사라지는 그림자 덩어리. 빛이 닿지 않는 그들은 축축하게 젖은 종이인형처럼 불안했다. 내밀한 삶은 서로에게 바닥까지 드러났지만 지나쳐온 많은 시간들로 모든 것을 알아버린 그들에겐 슬픔도, 동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서로에게 침묵했다.  


 여권이 생긴 뒤엔 빈디시 가족에게도 일상의 대화가 오갔다. 집안의 것들을 팔면서 생기가 돌았다. 비행기 멀미를 걱정하면서 새 옷을 재단했다. 머리를 잘랐다. 아말리에의 잠든 얼굴이 부부의 눈에 보였다. 빈디시의 아내가 웃었다. 그렇게 죽음이 지나가고, 과거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말리에를 찾아댔다. 빈디시 부부는 아무렇지 않게 아말리에의 약속을 챙겼다. 여권이 생긴 뒤의 빈디시 가족의 모습과 대비되어 이어지는 본문「은빛 십자가」는 그들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어떻게 한 인간을 짓밟는지를, 한 사람의 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모습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시대를 국가를 잘못 얻은 그녀의 삶이 이렇게 훼손되는 게 안타까워서, 아말리에의 담담함이 안쓰러워서, 당연하게 그녀의 작은 가슴을 움켜쥐는 그들의 손이 두려워서, 나는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삶의 앞, 뒷면을 한 번에 보아버린 듯 그 극단 앞에 눈이 매웠다.  

  침착하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차갑게 그들의 삶을 후려쳤지만 누구도 스스로의 잘못을 알진 못하는 듯 했다. 떠나는 날, 빈디시 부부는 회생 정장을 차려입었다. 때가 묻은 ‘꿩’의 모습으로 그들은 마을과 작별하려 한다. 무언가를 쟁취했다기보단 도망치는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그 사이 결혼한 ‘야간경비원’에게서 막 달아오르려는 삶의 냄새가 맡아졌다. 그들은 행복하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들의 내일은, 오늘과 다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림자이길 자청한 자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스스로를 숨길 곳을 위하여, 자신이 삼켜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빈디시는 밀가루포대를 들어올려 자전거에 싣는다. “인간은 강해.” 그가 말한다. “짐승보다 더 강하지.” - p.15

 

  그림자는 그늘로 들어서면 사라진다. 존재가 없어지고 무의미해 진다. 그것은 안전하게 느껴졌지만, 어리석은 삶의 입구로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땅을 딛고 서서 제 팔과 제 다리를 휘젓고,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면 어쩌면 그들은, 꿩보다는 나은 모습을 갖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강하게 자신의 삶을 몰아가지만, 결국 결정적인 힘이 가해지는 순간에는 약해지고 무능력해진다. 미래가 위협당하는 순간, 그들은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어떻게든 가야한다. 그토록 분명하게 인간은 강하다고 말했던 빈디시는 아말리에를 권력 앞에 내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두려워 자신의 집을 나서지 못했었다. 스스로를 조롱하듯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라고 말했다. 
  '몸집만 커다란 꿩은 어설프고 무력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살기 위해선 도덕도 인간다움도 버려야 하는 인간의 비애가 날지 못하는 꿩의 모습과 겹쳐져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빈디시 뿐만 아니라 분명, 지금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비춰지고 있는 꿩의 모습. 안전하게 살기 위해선 권력에 편승해야만 하는 현실. 섣불리 부정하고 틀렸다 말할 수 없는 현실. 두려움이 손과 발을 묶는 현실. 살기위해 그래야만 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면죄를 받는 잔인한 현실. 그렇게 우리도 빈디시의 마을에 살고 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불현듯 두려워진다. 삶을 팽팽하게 조이는 어떤 무게감에, 내게로 달려오는 내일 앞에 묵직한 책임감을 느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빈디시는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안에 살고 있다. 그가 조용히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내 인간다움을 이기고 나의 밖으로 출몰하지 않도록, 팽팽하게 마음을 조율해 본다. 그러나 내 입술은, 보는데로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은 한 인간을 ‘꿩’으로 전락시킬 수 있지만 그 현실을 박차고 나가는가, 갇히는가, 의 선택은 분명 자신의 몫이다. 삶은 결국 각자가 가진 그릇만큼 담기기 마련이고, 책임은 각자의 몫일 뿐이다. 다행인 건 누구도 서로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그림자 밖으로 꺼내겠다고, 그림자의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그 희망만이 내가 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를 이 책 곁에 두고 싶었다. 

 

  


오래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어둡다 문득 잠결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억, 그러나 그 친구 이미 오래 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은 기억, 죽어놓고도 생전처럼 또 묻던 그 말;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일어나 불을 켜고 창을 열자 파란불 들어 길을 건너는 인파들처럼 방 안으로 건너오는 눈발들, 눈발들도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창을 닫자 채 들어오지 못한 눈발들도 창을 치며 창틀에 주저앉으며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그러다 다행히 새벽 파란불 맞아 다시 촘촘하게 모여 한세상 건너가는 눈발들 새벽빛 스며 새파랗게 마치 풀밭처럼, 아니 적어도 내 눈 속엔 싱그러운 풀밭 소풍을 가 눕고 싶은 새파란 풀밭 다시 창을 열고 받아주기엔 너무나 광활한 풀밭 내가 먼저 달려나가 눕고 싶은 풀밭 그래서 창을 열고 쓰다듬다 손이 빠져 밑을 보니 아주 깊은  

 

깊은


- 신기섭 시집『분홍색 흐느낌』中,「봄눈」전문

짧지 않은 이 시를 여기에 옮기면서 콧날이 시큰하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이 시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도 그랬다. 펑펑 울어버릴 수 없는 슬픔들에 서러웠고, 곳곳에 꽃처럼 만개하던 죽음이 나를 비켜감에 서러웠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특별할 것 없이 존재하는 나를 인정할 수 있었을지. 몰아닥치는 삶의 모호함과 내 위로 넘어지던 가족의 무게를 내 몫인 양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덮은 뒤 며칠이 지나 이 시집을 4년 만에 다시 펼쳐 본다. 시인이 등단한 2005년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그 해 12월, 새벽 눈길 교통사고로 그는, 평상이며 바닥마다 하얗게 눈을 입고 그를 기다렸을 옥탑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물여섯, 그의 죽음이 왠지 가슴 깊이 남아 마지막 학기를 정리하던 나를 겨울바람처럼 모질게 흔들었었다. 5개월이 지나 시인을 시집으로 다시 만났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자신을 위로하듯 펼쳐낸 문장들. 애써 웃는 듯한 그의 문장들 위로 그의 치열했던 생이 겹겹이 베어나고 있었다. 그가 다 누리지 못한 채 놓아야 했던 젊음, 슬픔,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내게 스며들수록 나는 쓸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책했다.
옮겨놓은 이 시가 젊음 안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아파하던 그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들과 비슷한 시절 안에 쓰인 시인의 시이기 때문일까.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포개어 놓는다. 시인에게 조문을 하듯이, 이렇게 하면 그에게 하얀 꽃이 아닌 문장으로, 한 다발의 위로를 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윤, 명서, 미루, 단……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적고 보니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저 말줄임표의 뒤엔 내가 있고, 시인이 있고, 작가가 있고, 또 누군가의 젊음들이 빠뜨린 바늘코처럼 줄지어 서 있을 것이다.
젊음이라는 게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가장 철없이 울고 쉽게 절망하고 분노하고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무엇에든 치열히 맞서자 했던 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겹겹이 입은 패배의식에 늘 자책하고, 죽음을 동경했던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가장 싱그러웠을 때, 라 회상하게 되는 것 같다. 젊음의 옷이라는 게, 자유라는 게 내 삶을 날아갈 듯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공포감으로 몸 안에 뻗어나가는 불안과 괴로움에 스스로를 얼마나 증오하고 분노하게 되는지. 완전하지 못한 꿈과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없이 잃어버리고 싶던 시절.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느낌, 죽음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던 시절.
‘8년 만에……’ 걸려온 전화가 지나쳐온 어느 시간을 몰고 와 윤 앞에 와르르 쏟아낸 것처럼, 그 때를 떠올려 본다. 그것은 좀처럼 담기지도, 닦이지도 않고 물처럼 천천히 바닥의 굴곡을 타고 나아가 내 발 아래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조용히 웅크린다. 이내 파르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수면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 안에 담긴 눈,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던 그 때의 푸르고 가벼운 눈, 스물이란 경계선을 이제 막 넘은 자의 불안정하지만 기대에 찬 눈, 살아있는 눈, 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잘 있노라고, 8년 전의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청춘(靑春),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
손으로 적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활짝 펴지는 푸른 봄의 시절.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 때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여야만 한다는 것. 삶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상처받고 어수룩하고 뭉툭한 자신을 고통을 참으며 깎고 깎아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가는 초입 단계. 그 ‘경계의 시간’ 안에 놓인 윤, 명서, 미루, 단의 이야기는 정상을 알 수 없는 산자락의 초입에서 어떤 등산장비도 구비하지 못한 채 이제 막 한걸음을 떼려는 두려움에 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인일 뿐이었던 서로가 조금씩 서로의 고리를 더듬어 찾고 그 고리 안으로 손을, 가슴을 밀어 넣으면서 그들은 한 덩어리의 세계가 된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찾던 그 시간은, 과거를 나누고 상처를 나누던 그 시간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유일한 세계였다. 함께 걷고 읽고 쓰는 행위 속에서 건네는 말들, 무언의 행동과 불현듯 쏟는 혼잣말 등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짐을 나눠진다.

여자에게 가장 큰 버팀목일지 모를 엄마를 죽음으로부터 빼앗겨버린 윤. 언니의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 존재하는 손의 상흔으로부터 매일 확인해야 했던 미루. 그 죄책감에 동요하며 미루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명서. 존재의 상실감으로부터, 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단. 그들은 스스로의 안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를 끊임없이 헤매듯, 길을 걷고자 한다. 윤과 함께 걷기를 자처한 명서와 미루, 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차는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고 희망으로,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지면서도 꼭 그만큼 슬픔과 절망도 함께 늘어갔다.
그러나 삶은 어쩌면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돋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춘을 빛내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글을 연재하기 전에 이야기한 바 있지만 글의 곳곳에는 그렇게 죽음이 놓여있다. 마음을 나누던, 거울 앞에 서듯 서로의 앞에 서서 말을 나누던 반대쪽 존재가 사라짐으로 그들은 거대한 상실감의 무게로 휘청인다. 끝없이 기억을 퍼올리며 사라진 존재가 있던 시간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두 번째에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에 대면한 죽음 앞에서는 아직 함께 존재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그 마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달린다. 상실은 곧, 사라질까 두려운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한 거센 갈망과 욕망으로 뒤바뀐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련과 고난의 문제 앞에서 가장 강해지 않는가. 시간이, 사람이 나에게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앗아간다고 느낄 때 가장 예민해지고 민첩해진다. 미루의 죽음 앞에서 윤이 그토록 명서를 붙잡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함께 있어 나눌 것보다 서로에게 앗아갈 것이 더 많았던, 각자의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벅참이 서로에게 짐이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그들은, 각자의 슬픔 안으로 길을 내고 나아갔다. 혼자, 남아서 그렇게, 혼자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귀퉁이를 돌아 보이는 낯선 길 쪽으로, 조금은 삶에 고통에 무뎌진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나아갔다. 
 

-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

함께 있자는 윤에게 명서는 처음 입을 떼고 이렇게 말하는데, 다시 볼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서로가 흉측하게 변해간다는 것의 진실을,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마음을, 그토록 어른스럽게 서로를 놓아야 했던 그 안타까움을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어떻게든 이 고통엔 끝이 있고,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에 비롯된 이별은 아니었을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윤이 8년 전 갈색노트에 남긴 명서의 말 아래 천천히 한 마디의 의지를 새겨 넣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리운 그에게로 달려갔으리라 믿었다. 그래야만 이 책 밖으로 홀가분하게 나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풀리지 않는 미로 속에서 얽히고 얽히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스스로의 자리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윤교수’의 존재, 젊음을 짐으로 지고 살아가는 그들을 끌어주는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윤교수’는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과 나란히 있지만 유일하게 그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소란스러운 시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대 밖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어쩌면 이젠 스스로 나아가야만 하는, 청춘의 시절을 벗어난 윤과 명서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용서할 순 없어도 이해할 순 있는, 그런 삶으로 근접해가고 있을까.

나는, 그럼 나는……

미루를 보내고 온 윤과 명서에게 윤교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학교를 그만두면서 학생들에게 남긴 윤교수 편지의 마지막 부분, 


-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있으라  


어쩌면 지금의 나는, 청춘을 벗어나는 그 목전에 서서 마지막 걸음을 떼지 못하고 종종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어설프게 살아내면서, 못다 채운 것과 잃어버린 것과 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연연하면서 매일 어제를 잊자, 하고 살진 않는지. 그래도 다행히 그 시절은 내 안에 고스란히 쌓여있었고 그렇게 윤과 함께 찾아와 내 지나온 시간들을 위로해주었다. 거기서 고독을 딛고 나아가려 발버둥치던 내 곁의 사람들과 꿈과 강의실에서 맡아지던 풀냄새 같은, ‘언젠가’에 대한 설렘들을 내 안에 다시 ‘보이는 곳’으로 옮겨 둘 수 있었다.

이 글이 연재될 당시는 내가 출산 후 7개월에 접어들 때였다. 청춘소설이란 말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두었다.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그 밝음에 눈이 부시고 내가 더 작아질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누군가는 내가 결혼과 아이 모든 것을 채웠으니 청춘의 끝자락을 망설임 없이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해야 하듯이 아직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 형상을 바라보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일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다시 확인한다. 여전히 고독하다는 것, ‘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눠보지 못했다는 것, 여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로 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들이 남아있다는 생각. 그것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수록 나는 성장할 것이며 그것이 언젠가 내게 추억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언젠가 꿈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오늘의 무거웠던 시련이 내일의 시련을 가볍게 하고 언젠가 모든 무게가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기대하고 싶어졌다. 그 믿음 속에서 절망과 분노와 슬픔의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기대감이 오늘에게 지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스스로를 다독여 내일로 건내주는 것 아닐까. 돌아가고 싶었던 그 시간을 만나면서, 혼자이고 싶은 이 마음이 어쩌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나를 고독으로부터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다가오는 시간, 나를 항해하게 하는 아이, 가족.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 에피소드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윤의 한 줄의 망설임이, 한 줄의 슬픔이, 한 줄의 진실이 알아버린 그들의 이야기와 얽혀 고스란히 읽혔다. 그리고 다시 이별 앞에서 책을 덮었다. 그들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도 젊음이 남긴 상흔 앞에 휘청이지 않았으면 한다. 강물을 두려워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건널 수 있기를. 내가 나의 가족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줄 수 있기를. 늘 ‘언젠가’를 꿈꿀 수 있었으면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이들의 얼굴이, 동그란 알전구처럼 머릿속에 빼곡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그들도 지금 이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겠지. 그리움 속에서 그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이곳으로 밀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의 모든 재생이 끝나고, 다시 첫 트랙으로 돌아가 음악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 낯익듯, 낯설듯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손끝을 산뜻하게 한다. 계절이 또 다른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나는 오늘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오늘을 기다린다. 다시 그 때의 푸른 봄철 같은 시간을 껴입고서, 조금은 담담하게, 지금을 살아 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