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버4/절단 동서 미스터리 북스 45
조이스 포터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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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조이스 포터의 도버 경감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인 <도버 4 / 절단>과 라이오넬 화이트의 <어느 사형수의 파일>이다. 두 작품 모두 중편 정도의 분량이다. 라오넬 화이트의 작품을 수록해 준 것은 고맙지만 기왕 작품 제목으로 골랐다면 조이스 포터의 작품을 두 작품 실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고 도버 시리즈가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대단한 평가를 받는 작가의 유머러스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유머는 고급이든 저급이든 우리네 정서와는 약간의 갭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특이하고 정석에서 벗어난 이런 작품도 볼만 하고 신선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무대포에 부하 직원만 부려먹고 말도 안 되는 추리를 하고 실수만 거듭하는 것 같아 보이는 뚱보 경감 도버지만 세상의 모든 탐정이 홈즈일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이런 경감의 모습이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듯 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다음 작품인 <어느 사형수의 파일>이었다. 차라리 이 작품이 앞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너무 전형적이다. 그렇다면 난 전형적인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어느 출판사든 조이스 포터의 도버 경감 시리즈는 7편밖에 안되니 전집으로 출판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이 시리즈에 반할 사람들도 꽤 있을 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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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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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을 읽으면 언제나 감탄하게 된다. 그저 담담하고 조용하게 누군가 친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철학적이다. 가끔 그가 천재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천재가 아니라면 이런 글을 쓸수 없을 테니까.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고 편안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말이다. 국립관현악단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고뇌를 담담하게 독백하는 모노 드라마다. 콘트라베니스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만들어졌고 모양은 왜 그렇게 추하게 되었으며 콘트라베이스만을 위한 작품이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곡자들의 곡이라는 불만과 유명한 작곡자, 모차르트, 바그너에 대한 혹평, 사랑하는 소프라노 세라에 대한 갈망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고 폼 나지 않은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과감하게 그만두지 못하는 소시민의 갈등이 공감대를 형성한다.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 하나가 이런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콘트라베이스는 폼 나거나 주목받는 악기가 아니다. 크기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보다 크지만 그런 악기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바이올리니스트나 첼리스트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연주자로서가 아닌 관현악단의 구색 맞추기의 일원일 뿐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이런 현실을 작품 속에서 푸념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그 사실을 인정받지 못해 고뇌하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마저 깃들여 있다.

이것은 단순한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인의 고뇌를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통해 나타낸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자신이 보 잘 것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이 좀 더 대우받지 못하는 데 속상해 하면서도 그 일을 계속하는 자신에게 날마다 실망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소시민의 심리를 잘 표현한 작가만의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료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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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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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은 독특하다. 한편 한편이 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단편 속의 주인공들은 평범하지만 그만큼 독특하다. 소재 또한, 흡혈귀라든가, 벼락을 맞으러 다니는 사람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독특하다. 그 속에서 나는 자신을 본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이웃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이 별거냐, 다 그런 거지... 꼭 사기 친 사람이 사기 당한 사람한테 야,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이라든지, 꿈이라든지, 인생의 많은 화두들이 부질없는 뜬구름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허무함이라기 보다는 그저 이런 인생도 있고 저런 인생도 있는 거지 뭐... 하는 식의 인생 늘어놓기 같다. 재미있다. 사실적이다. 어떤 기교도 없다. 신선하다. 이만교와 더불어 내가 즐겨 있는 단 한 명의 작가다. 이 작가에게 우리 문학의 미래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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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혼례 캐드펠 시리즈 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이창남 옮김 / 북하우스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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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고 나이 든 남자에게 보호해 줄 사람 한 명 없는 어린 소녀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십자군 전쟁의 영웅인데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사악한 친척이 있어 그녀를 돈에 팔아 넘기려 하고 있다. 결혼식 전날 어디를 갔다 온 신랑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거짓과 배신과 더러운 욕망과 계략이 춤을 추는 비운의 결혼식 전 날밤, 신랑은 어디론가 산책을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되고 그에게 쫓겨난 젊은 향사는 그를 죽인 범인으로 몰려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런 와중에서 캐드펠은 증거가 없는 동안은 범인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랑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젊은 향사는 그를 도와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범인은 주인에게 반항하고 소녀를 흠모하던 시종이 지목되지만 캐드펠은 그의 몸에 붙은 풀꽃 한 송이에 주목한다. 특정 지역에서만 사는 꽃. 그는 어디를 갔다 오는 길이었을까? 그리고 늙은 나병 환자는 누구일까? 수도원과 그 주변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한편의 서사시처럼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캐드펠 시리즈가 모두 나름대로 아름답고 애잔한 로맨스를 한가지씩 소개하지만 이 작품은 두 가지의 로맨스를 소개하고 있다. 젊은 처녀의 밝은 로맨스와 나이 든 첩의 쓸쓸한 로맨스를. 그런데 나이 든 첩의 로맨스가 더 가슴에 와 닿으니 역시 나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일본 추리 소설을 보면 범인은 항상 이 사람만은 범인이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이어서 더 비극적으로 보이고 가슴 아픈 기억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나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의당 범인이었으면 하는 사람이 범인이고 범인이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은 절대 범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지막에 언제나 해피엔딩을 그리게 하기 때문에 마음을 가볍게 하는 효과가 있다. 더 나아가서 항상 일어나는 살인의 피해자도 언제나 등장 인물 가운데 죽기 적당한 사람이라던가, 좀 더 나쁜 사람이고 죽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 남는다. 물론 가끔 예외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런 작품도 그다지 비극은 아니다.  

신은 선한 인간은 항상 돌보고 계신다. 그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억울함을 신은 알고 계시며 언제나 그를 도울 사자를 준비하신다.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가 우리에게 언제나 하는 말이다. 거짓없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에 보답을 받고, 믿음에 대한 배신은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누군가의 불행을 가슴 아파하고 그에게 믿음의 손을 내밀고 있는가, 그것이 보잘것없고 나약하다 하더라도. 아니면 더럽고 추한 손으로 불행에 빠진 자를 낭떠러지로 밀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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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순례자 캐드펠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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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흔히 이런 고민에 빠진다. 삼류 소설에서처럼, 삼류 드라마에서처럼 사랑이냐 의리냐 하고 말이다. 한 남자가 고행의 순례를 떠나고 있다. 그 남자 곁에는 한 남자가 따르고 있다. 그 둘은 친구처럼 보인다. 그를 따르던 남자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과연 남자의 선택은.  

이 작품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기적으로 일어서게 된 룬 수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수사가 아니지만. 그의 맑고 투명한 영혼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그의 모습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자세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무신론자인 나도 가끔 신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더 그렇다. 신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다 보면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모든 종교인이 룬 수사나 적어도 캐드펠 수사와 같은 모습이라면 종교도 믿어 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명예란 무엇인가. 대치와 반목과 전쟁의 시대에 지켜야 하는 명예란 과연 어떤 것인가. 남을 존중하는 것. 그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 해도, 그가 종교가 다른 이라 해도, 그가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공정하고 정직하다면 서로 다른 위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명예라고 생각한다. 아니 캐드펠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리차드왕을 따르는 사람이든, 모드황후를 지지하는 이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던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던지, 지위가 높은 영주이든, 낮은 농노이든 서로가 믿고 따르는 가치관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 위에 합리적인 이해와 화해를 이루자고 말한다. 그래서 설사 전쟁에서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으슥한 골목에서 등뒤를 노리고 칼을 들이대는 자기편 사람조차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편 사람이 사악하고 치졸한 자기편에게 당하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다. 옳은 일이 아니라고 명예가 말을 하니까. 성녀가 내리는 기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들 서로가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와 안식을 이루는 일 아닐까. 지금 자신의 종교만을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들 사상만이 최고라고 떠드는 이들, 작게는 제 사랑만이 존재하고 남의 사랑은 무시하는 편협한 이들, 반성하기 바란다. 하늘에 계신 모든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분이 비를 내리고 계신다. 그 분이 경고하는 뜻을 부디 이해하기를.

내가 만약 신이라고 한다면 -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겠지만 - 내게서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를 믿어 주는 인간이 훨씬 예뻐서 그의 소원을 가장 먼저 들어줄 것 같다. 또,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가진 전부를 바치면서 그것의 가치에 부끄러워하는 자를 더욱 어여삐 여길 것 같다. 적어도 인간보다 높은 곳에 있는 신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도 모두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인간인지라 바라는 신의 모습과 다르게 행동하고 알면서도 신이 원하리라고 믿는 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남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신을 내세워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들의 눈에는 고행을 하는 순례자로 비칠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무서운 무지는 이런 사실도 잊어버리게 만든다. 아, 하느님은 참 슬프시겠다. 이런 이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끄러워 잠도 못 주무시겠다. 가끔 하느님은 기적을 보이시고 내 뜻은 이런 거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이 또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죄는 너무 커서 천국에 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 할 지 모른다.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장소나 인물, 사상 등이 있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카톨릭교나 성당이 그런 일을 했다. 그곳은 사람들의 정의나 진실을 위한 약한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했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죄를 감추고 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힘없고 정의만으로 충만한 의리 있는 자가 벌받지 않고 도망가려는 자를 가만둘 수밖에 없다면 그는 도대체 정의를 어떤 방식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느님은 의지 있고 정의로운 자를 내려보내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는 것 같다. 그것은 이 시대에 정의로운 자가 하느님의 신하라는 이야기는 아닐까. 거짓되게 종교를 믿는 지도자나 종교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종교인이 아니라 말이다. 아만도 이 작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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