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나 사이의 인식차이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연보호와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것이 중립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닌 한쪽으로 쏠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2퍼센트 모자란 느낌을 준다. 이 작품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이면 고양이였을까? 다 읽고 내가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점령당한 의문이었다. 고양이는 잡식성 동물이다. 새도 잡아먹고 새의 알도 먹는다. 그런 고양이에게, 물론 애완 고양이기는 하지만 갈매기의 알을 맡긴다는 것이 좀 억지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캐스팅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얘기다.

 

고양이가 아니라 초식 동물이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초식 동물은 갈매기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인간과도 거리감이 있다. 인간의 시각 내에서 모든 것은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인간, 나쁜 인간, 좋은 고양이, 나쁜 고양이식의 이분법적 편 가르기를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가 모두 인간에 의해 설정된 인간 편의적이라는 점이 불편하다는 얘기다. 자연적의 반대 개념은 인공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반대 개념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인간이 소통을 말하고 있다. 인간들끼리의 소통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어려서 읽은 동화와 우화의 잔인함을 커서 느끼게 되듯이 이 작품 속 고양이와 갈매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 설정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있음직한 한 가지 별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어의 눈물처럼 느끼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갈매기를 키운 고양이는 갈매기나 갈매기 알을 먹지 않았을까? 육식을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자연적인 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버리니 세상이 비틀리는 것이다. 토끼에게 잘 먹는다고 달걀 프라이를 주어서 토키의 난폭함을 키워주고 양의 뼈는 사료로 쓰면 안 되는 데 그 사료를 초식 동물인 소에게 먹여 결국 광우병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구분할 수 있는 기준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 맞서는 유일한 동물이 되어 버렸다. 책에서까지 인간이 자연을 자연적이지 않게 만들고 자연적 본성을 파괴하여 인간을 위한 안식의 제물로 만들어야 했을까. 작가에게 묻고 싶다.

 

이래서 내가 세풀베다의 작품은 <핫라인>과 <감성적 킬러의 고백>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작품들에서는 인공 감미료의 느끼한 맛은 느껴지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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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0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걸 노린것이 아닌 걸까요..^^
포식자의 입장인 고양이를 통해 그보다 더 막강한 포식자인 인간의 교화..^^

물만두 2006-08-0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요? 교화라... 반성과 성찰이 아닌... 생각해 볼 문제군요^^:;;

해적오리 2006-08-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의 언니 페퍼보고 이책 표지가 이쁘길래 보관함에 넣었는데 ... 리뷰를 읽고 나니 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오..

물만두 2006-08-03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난적 나는 다른분과 시각차이가 큰 편이니 나 믿지 말고 읽고 판단하라구. 책은 스스로 읽어야 맛이지. 리뷰보고 읽는게 아니쥐~

물만두 2006-08-0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우 내 시각이 삐딱하이 ㅡ..ㅡ

물만두 2006-08-0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옥상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