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매달린 여우의 숲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종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작품을 처음 접할 때 자연적으로 눈길이 가는 것이 표지와 제목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작품은 왜? 라는 생각을 하며 작품을 읽게 했다. 왜 제목이 목 매달린 여우의 숲일까?


그건 단순하게 숲 속에 자리를 잡게 된 범죄 동업자를 피해 도망 온 금괴 도둑과 모의 전쟁 훈련 도중 우연히 그 도둑을 본 술 주정뱅이 소령이 무급 휴직을 하고 그를 찾아와서 숲속의 오두막에서 동거를 하게 되고 그곳에 다시 양로원으로 데려가려던 사회복지사에게서 도망을 친 사미족 노파가 오면서 그 숲에서 여우가 많으니 덫을 놓아 잡으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다. 그들은 숲에 여우를 잡을 덫을 놓고 그 숲을 <목 매달린 여우의 숲>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둑이 가지고 온 금괴로 생활을 한다.


이 작품의 아이러니한 유머는 도둑이 공범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금괴를 나눠주기 싫어 마치 자기는 정당하게 금괴를 가질 만한 사람이고 그들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대목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술주정뱅이 소령이 막무가내 모의 전투를 순식간에 승리로 장식하는 장면 또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사미족 노파에게 아흔살 생일 축하를 빙자해서 온 사람들은 웃음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미족이라 부르지만 라프족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나라 백과사전에도 사미족은 없지만 라프족은 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자신들의 종족 이름조차도 남들이 부여한 데로 불려야 하는 처지가 지금도 사라지고 있다는 수많은 소수 종족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팠다.


하지만 할머니는 대번에 오두막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을 담담하게 보낸다. 그것이 평범한 일상이라면 말이지만. 심각한 것이 너무 없이 쉽게 풀려서 오히려 심각하게 보여 지는 작품이다. 과연 이 작품을 재미만으로 볼 수 있을지. 내 눈에는 산다는 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게 되면 자연적으로 술술 풀리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져 씁쓸했다.


파실리나식 유머는 그 덫에 하필이면 독일어로 쓴 ‘만일 당신이 사람이라면 이 덫을 조심하십시오.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쓴 것과 그 덫에 예견한 것처럼 마지막에 독일들만 걸랴들었다는 것에서 절정을 달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직도 유럽인들의 독일인들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일본인을 생각할 때 느끼는 것만큼 깊다는 것을 말하는 듯 느껴졌다. 총리가 무릎을 꿇었음에도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그들의 모습에서 이 책이 일본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면 일본인들은 무엇을 느낄지가 궁금하다.

 

또한 오백마르크를 물고 가서 이름이 오백마르크가 된 어린 여우가 어미가 되어 새끼를 열마리 낳았다며 이제 오천마르크가 되었으니 숲을 보존하는데 이보다 더 유익하고 남는 장사가 어디있냐는 말은 그야말로 기발하기까지 하다. 그 어떤 구호보다 좋았는데 그럼 왜 벌목으로 숲을 망치는 것은 안되고 여우를 덫으로 잡는 건 허용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자연의 매카니즘이다. 사슴이 너무 많으면 일정량을 잡아야 하는 것처럼. 범죄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일정하게 감옥에 보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슴에게도 오백마르크라는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주인공이 아니니 안된 일이다. 뭐, 사는게 그런건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싶다.


우리에게는 핀란드는 아주 먼 나라다. 그래서 그들 식 유머는 낯설다. 하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내보이는 작가의 글 속에서 비범한 단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뭐, 이런 삶도 있어도 상관없겠지... 세상에 똑같은 삶이 꼭 필요한 건, 똑같은 가치관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계속 주목해보고 싶다. 다음에 출간될 작품이 <독을 끓이는 여자>라는 또 입맛 당기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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