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이해의 중요한 초석이 될 국내 최초의 러시아 지리연구서
러시아는 세계 대륙 면적의 8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과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로, 역사적으로 수십만의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과거 냉전시대 동안 우리에게 구 소련은 적성국가 또는 금단의 국가로 취급되면서 미지의 나라로 남아 있었다. 1991년 말 구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급진적으로 단행해 왔으며, 이러한 체제전환 과정에서 혼란과 무질서가 가중되면서 러시아는 여러 부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함으로써 무한한 경제적 성장가능성을 지닌 국가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와 같이 자연자원이 빈약한 입장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의 지리적 현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보다 원할한 교류와 협력을 도모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에 러시아와 국교를 수립한 이후에 물자의 교역과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최근에는 러시아로의 관광여행까지 일반화되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문헌이나 정보는 역사, 정치, 경제에 관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지역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지리서(地理書)는 매우 적었다. 지리서마저도 과거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정치경제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소비에트 국가 세계를 강조한 <계통지리서>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자연환경 속에서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기술한 <지역지리서>가 필수적이며,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의 지리의 출간은 러시아 이해의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리적 인접성뿐만 아니라 경제, 과학기술, 문화 등에서 이상적 형태의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다. 한러 수교 이후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는 괄목할만한 수준으로 증가하였지만 기대치만큼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북러정상회담의 핵심의제로 논의된 한반도종단철도(TKR)―시베리아횡단철도 연결계획, 그리고 러시아 정부의 극동발전계획이 보다 가시화된다면, 한국-러시아 교류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며, 앞으로 양국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더욱더 활성화될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러시아의 계통지리적 현황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특성을 다루었고, 제2부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지적(地誌的)으로 기술하였으며, 제3부는 우리나라와 가깝고 교류가 많은 극동지역을 상세하게 취급하였다. 특히 이 책은 러시아의 각 지역에 중점을 두고 그곳에서의 여러 가지 특성, 즉 자연환경과 주민의 생산형태, 생활양식, 환경 문제는 물론 역사?문화적 경관까지 이해하기 쉽게 지지적으로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의 생활과 풍토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종합하면서,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자연환경 속에 있는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러시아 지역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길 기대해 본다. - 에벤크 은 극동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여행인 이상인의 32일간 시베리아 횡단기이다. 같은 유럽이고 같은 아시아이지만, 또다른 풍광과 언어를 가진 땅, 러시아. 쌀쌀해만 보이던 러시아인들의 뒷맛은 셔벗처럼 달콤하기도 하다. 시베리아의 차가운 칼바람에 무뎌진 정신을 쓱쓱~ 베어가며 겪어낸 여행기가 낯선 땅만큼이나 낯선 묘미를 느끼게 한다.
1. 겨울 시베리아 횡단길 - 정신에 낀 기름기를 걷어내는 시간
여행인 이지상은 2000년 10월 25일부터 32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려냈다. 짧은 여정이었다. 러시아는 가난하지만 값싼 여행지가 아니어서 장기여행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그가 떠날 무렵 한국은 가을이었지만 시베리아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땅 시베리아를 바람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을 하며 그는 겨울 시베리아 여행이 그 자신에게만 부여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게 된다. 그것은 느슨해진 정신의 조임, 무뎌진 마음 속 칼날의 벼림이었다.
여행 도중 마주친 소위 '여행가'들은 첫여행의 설레임을 잊어버린 채 풀어진 눈빛으로 여행을 일상으로 그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지상은 깨닫는다 - 게으름, 빈둥거림, 적당한 쾌락. 현실을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휴식이며 재충전을 위한 소중한 행위였을 순간들이 오래된 여행자들에게는 타락을 위한 전주곡이라는 것을. 익숙함에 탐닉하는 순간 나태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져 구역질 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리하여 여행중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몸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길을 바람을 맞으며 걸을 때면 그동안 무디어진 정신이 숫돌에 쓱쓱 갈아지는 기분이었고, 뱃살에 낀 기름이 찬바람에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2. 끝없는 눈밭과 유럽을 닮은 도시들 속을 방랑하다
이지상이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셔벗맛이었다.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얼음과자 셔벗처럼 러시아 사람들은 한없이 쌀쌀맞았으며 또한 한없이 정겨웠다. 이방인을 거부하는 호텔들 앞에서 여러 번 문전박대를 당했고 영어 메뉴판을 찾아 몇 시간이고 거리를 헤맨 적도 많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없이 포장지로 싼 담배를 선물하고 보드카 세례를 퍼부으며 열렬히 맞아준 것도 그들이었다.
시베리아의 중심에서 그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형태의 솟대와 장승 등을 발견하고는 신기함을 느꼈다. 그 어디쯤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만큼 부랴트족은 우리의 모습을 쏙 빼닮아 있었다. 울란우데에서 만난 한 남자 대학생은 십 년 전 그의 동창의 얼굴과 너무 똑같아 그는 알 수 없는 시간의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시베리아를 벗어나 도시로 들어서니 유럽과 다를 바 없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호텔 TV에서는 포르노가 돌아가고, 거리의 모퉁이마다 마주치게 되는 미국식 패스트푸드점들 ... 사람들도 발걸음이 바뻐 보였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레닌의 나라. 차이코프스키와 '우울한 미소'의 나라. 이곳에선 모든 것이 진행형이었다. 사람들의 꿈과 욕망도 서구식 자본주의에 맞게 재단되어 조금은 어설픈 모양새로 키워지고 있는 땅, 그곳이 러시아였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상념들, 한줌의 지식과 경험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나는 여행하는 사람일 뿐, 앞으로 가는 발길만큼 상념은 뒤로 흘러가게 하라."
3.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오고 싶은 땅, 시베리아
32일간의 숨가빴던 여정을 마치고 다시 귀환길에 올랐다. 정신의 기름기를 뺀 탓일까. 그동안 익숙하게 여기고 지나쳤던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이지상은 여행가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리라. "우리의 삶처럼 여행길에는 온갖 희로애락이 다 있었다. 여행은 압축된 삶이었다.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삶이었다."
12월 4일 러시아에서 열린 '한-러 교통위원회' 회의는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연결 사업을 논의하는 데 합의했다. 그보다 앞선 11월20일, 러시아 철도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북한의 동해안 철도를 앞으로 2-3년 안에 연결한다는 계획을 갖고 심의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러시아 소리방송은 전했다.
이지상은 꿈꾼다. 우리의 끊어진 국토가 다시 이어지는 그날, 세계로 가는 기차를 타고 평양을, 원산을 지나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베를린으로, 파리로 뻗어 나갈 수 있기를. 대륙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곳을 다시 한번 종횡무진하게 될 그날을 ...  -
에벤크족(초기 퉁구스족)은 북쪽의 툰드라와... 부랴트족과 에벤크족은 순록을 키우고 낚시를 했으며

 다양한 문화 코드로 풀어내는 육식 터부의 세계사
한국인이 먹는 육류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몇 해 전 개고기 식용논란으로 떠들썩했을 때, 많은 서양인들은 개고기 식용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런 식의 특정 육류에 대한 거부감은 다양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유형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먹는 육류의 종류를 따져보면, 우리의 육식 습관도 세계의 다른 민족들처럼 실제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용 가능한 육류의 대부분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문스는 서구인들이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도 너무 조급하게 질병과 환경적 요인에 대한 현대의 견해들을 인용하여 특정 문화가 특정 종류의 육류를 왜 기피하는지에 관한 설명으로 삼으려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먹는 육류와 그 육류를 먹는 이유를 물으면, 자신이 먹는 육류는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이 적당하며 맛과 영양가가 훌륭하며 건강상으로도 위험이 없다고 말한다. 즉 영양학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식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점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의 육식 습관은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영양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개고기 식용은 단순히 개고기가 풍부한 단백질 섭취원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뱀을 먹는 것은 어떤가? 영양학적인 면에서 지렁이는 아주 뛰어난 단백질 공급원이다. 경제적 요인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곰발바닥 요리나 제비집 요리 혹은 상어지느러미 수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의 한 종족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강 유역에 살지만 생선은 일체 입에 대지 않는다. 인도는 매년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죽지만 결코 소를 잡아먹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돼지고기 기피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 지역 역사를 조사해보면 돼지고기 기피 현상은 이슬람이 전파되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쇠고기 기피 원인으로 기존의 학자들은 경제적인 요인을 든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시문스의 견해는 다르다. 쇠고기 거부감의 근원은 보다 근본적으로 종교가 발휘한 영향력, 종교 자체의 논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음식 금기를 해명할 수 있는 단일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환경, 종교, 관습, 신분 제도, 전통 등 여러 측면이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단순히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고 먹을 수 있으며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음식이 될 수는 없다. 영양이나 경제적인 요인만이 주 결정인자라면 수많은 종류의 가용 식량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실제로 식량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반드시 그 음식을 먹는 집단의 문화 코드에 적합한 식재료라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문스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파생된 육식 터부의 관습 속에서 제례적 순수성과 건강 및 행복의 유지라는 강력하고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식사 습관의 근저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시문스는 모든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육식 터부의 유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류 문화의 맥락 속에서 종교적, 도덕적, 위생학적, 생태학적, 경제적 요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을 강조한다.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본 육식 터부
육식에 대한 금지 조치는 평생 지속되기도 하고, 특정 시기에만 내려지기도 하며, 특정한 부류의 인간에게만 내려지기도 한다. 초상이 났을 때나 질병이 심할 때, 종교적인 금식일 등에는 특정 육류에 대한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 또 특정 식품 한두 가지를 다른 식품과 함께 요리하거나 먹는 경우에만 금기가 발효되기도 한다. 마사이족 전사의 이상적인 식단은 고기와 우유, 피밖에 없다. 하지만 결코 고기와 우유를 같이 먹지 않는다. 에스키모들은 해산물과 육지에서 나는 음식 재료를 섞지 않는다. 브라질의 남비콰라 인디언들은 식용 가능한 가축을 많이 기르지만 이 가축들은 오로지 애완동물일 뿐이다. 그들은 가축과 음식을 나눠먹고 함께 놀고 이야기하지만 자기들이 기르는 닭이 낳은 달걀조차도 먹지 않는다. 정통 유대교도나 무슬림들은 제례적인 규정을 준수하여 축성을 받지 못한 고기는 결코 먹지 않는다. 뉴기니의 한 마을에서는 고의적으로 잔인하게 돼지를 잡는 전통이 있는데, 돼지의 비명소리가 없으면 망고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믿음을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터부는 고기의 상태와도 관련된다. 상한 고기나 죽은 동물의 고기는 흔히 거부되지만, 또 그런 고기라도 꺼리지 않는 집단이 있다. 보르네오의 무루트족은 오직 집에서 기른 돼지의 고기만 먹고, 이웃 마을의 돼지는 먹지 않는다.
육류의 종류에 따라 존재하는 다양한 터부 형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돼지고기
* 아시리아의 꿈 해몽책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꿈은 신들의 분노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라고 한다.
* 돼지고기의 식용 여부는 무슬림들을 그들의 적인 기독교도와 구별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집트의 무슬림들은 돼지를 지독히도 싫어하여 돼지와 닿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이라 여겼다.
* 북유럽에서는 돼지를 곡물의 신으로 간주하며 풍요롭게 하는 돼지의 능력이 꼬리에 집중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리를 처음 파종할 때 돼지 꼬리를 흙에 꽂아두고 보리의 키가 그만큼 자라도록 기원한다.
돼지고기 기피 현상의 대표적 중심지는 근동 지역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슬람이라는 종교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동 지역에서의 돼지고기 기피 현상은 이슬람교가 발흥하기 전부터 이미 있어왔고, 현대의 일부 비무슬림 집단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키스(Keeth)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집트에서의 돼지고기 기피 현상은 호루스와 세트 간의 적대감에서 찾을 수 있다.「관 문서」에는 호루스가 돼지로 변한 세트에 의해 눈을 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신교 체제 속의 한 신인 세트는 멸시의 대상이었으며 이 신의 상징 동물인 돼지 또한 낮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450년경의 사람인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돼지를 치는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고, 혹 지위가 높은 사람이 어쩌다 돼지와 몸이 스치기라도 하면 나일 강으로 달려가서 옷을 입은 채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정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도투스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돼지고기에 대한 거부 현상에도 불구하고 돼지는 여전히 사육되고 식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히브리에서의 돼지에 대한 태도는 더 분명한데, 「레위기」에서는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간주하여 그 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으며, 그밖의 성경 구절에서 매력적이지만 취미가 저속한 여인을 가리키는 말로 “암퇘지 주둥이에 금반지”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도 돼지의 지위가 낮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가 흘러 <탈무드>에서는 돼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하려고 해서 돼지를 가리킬 때 ‘다른 어떤 것’(이름으로 불리면 안 될 어떤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는 야생 돼지를 잡아먹었지만, 특정한 날에는 야생 돼지와 사육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직 불결하지 않은 어린 돼지의 경우 질병의 치료나 축귀 목적의 제례에서 도살되었다. 아시리아에서 산욕열에 관련된 악령인 라마슈투는 ‘임산부, 젊은 어머니와 아기들’에게 적대적인 존재인데, 라마슈투는 어린 돼지와 강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혹은 돼지 한 마리를 옆에 거느리고 들판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돼지고기의 기피 원인을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돌릴 수 없음은 위의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학자들은 돼지고기 기피 원인으로 위생 가설, 선모충병 가설, 경제적, 환경적, 생태학적 가설, 상징 및 신앙 가설과 기타 목축민이나 인도유럽인들의 영향을 들고 있다.
쇠고기
* 중부 인도의 브힐족은 ‘암소 살해’를 여러 번 저지른 사람은 나병에 걸린다고 여긴다.
* 힌두교도의 쇠고기 식용 거부는 수백년간에 걸친 불교도와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브라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불교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결국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쇠고기 거부의 중심지는 인도이다. 기존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에서의 쇠고기 거부 현상은 인도의 자연 환경이나 경제적인 요인과 관련이 있다. 마빈 해리스, 칼튼 쿤 등의 견해에 따르면,소의 도살이 인도에서 금지된 까닭은 소가 농경에 지극히 필요한 동물이며, 따라서 소를 식량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살려두어 노동에 종사시키는 것이 훨씬 큰 경제적 이익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소의 도살이 금지되었고 이 금지 조치는 종교적 교리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는 소에 대한 보호는 이런 경제적 동기에서 출발한 산물인 것이다. 시문스는 쇠고기 거부감의 근원은 보다 근본적으로 종교가 발휘한 영향력, 종교 자체의 논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도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아리아인에게 소는 우유와 고기의 공급원이었으며 수레를 끄는 등의 수송에 필요한 보조원이자 부의 척도였다. 아리아인의 전투에서 승자의 전리품은 소였으며, 아리아어에서 전투를 뜻하는 단어는 ‘소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 번역된다. 아리아족의 신성한 문학인 베다에도 소, 즉 암소와 수소, 황소의 제례적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음이 드러나 있다. 황소는 힘의 상징이었으며 특히 전투와 기후의 신인 인드라는 쇠고기를 아주 좋아했다. 결혼식이나 중요한 귀빈의 대접을 위해 암소를 도살했으며 왕이나 사제, 현인들에게도 충분히 음식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즉 고대 인도인들에게서는 쇠고기 기피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문헌에서 불살생 개념이 처음 나오는 것은 기원전 6세기와 기원전 5세기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자이나교도들과 불교도들은 불살생을 주장했지만 특별히 소의 도살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신성한 암소’라는 개념은 서력 기원이 시작될 무렵의 베다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처음에는 불살생 개념과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서히 브라만 계층 사이에서 신성한 암소의 개념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4세기 무렵에는 암소를 죽이면 사형을 당했으며, 7세기 인도에 온 중국인 여행자 현장 스님은 인도인들이 수소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누구든 그런 고기를 먹는다면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성한 암소의 개념은 인도에 외부 세력이 침입함으로써 더욱 중요시되었다. 11세기 무슬림의 침입 이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경쟁 사이에서 신성한 암소 개념은 큰 동력을 얻게 되었으며, 유럽인들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유럽인들 역시 신성한 암소에 대한 인도인들의 감정 때문에 가끔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 예로 1670년에 인도의 서부 해안에 있는 호노레 소재의 한 유럽무역센터에서 기르던 불독 한 마리가 암소를 죽였는데, 성난 군중은 이에 대한 반발로 그곳의 유럽인들을 모두 살해했다. 암소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에 대한 복종은 전통적인 힌두교도 대중의 마음속에 워낙 깊게 뿌리박혀 있으므로, 인도가 독립하자마자 암소에 대한 보호와 암소 도살 금지령이 인도의 헌법에 포함되었다.
닭고기와 달걀
* 동부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은 유럽인 여행자가 달걀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여행자가 아프리카인들이 쓰레기를 먹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느꼈을 법한 역겨움을 느꼈다.
* 케이프 지역의 템부족과 핑고족, 은구니족은 달걀이 최음 효과가 있으며 달걀을 먹은 여성들은 다른 부락 출신의 남성들에게 접근하게 된다고 믿는다. 실제로 어떤 여성이 남성에게 “내가 당신에게 달걀 요리를 해줄게”라고 말하면 성적인 접근으로 받아들여진다.
* 리투아니아에서는 수탉이 ‘예언자의 노래’를 부른다고 여긴다. 수탉의 울음은 ‘끝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젊어지는 자연의 리듬’을 반영한 것이라 본다.
동남아시아에서 닭은 희생공양이나 점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닭의 피 또는 내장이나 간을 이용하여 점을 치고, 닭의 다리뼈나 대퇴골의 미세한 구멍의 각도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푸룸 쿠키 부족은 새로 건설할 마을의 위치를 결정할 때 수탉을 이용한다. 한 남자가 기도문을 낭송하면서 수탉의 목을 졸라 죽여 땅에 떨어뜨린다. 닭이 죽은 뒤 다리가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에 따라 길흉이 판정된다.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 위에 놓여 있으면 길조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장소는 마을의 후보지로서 실격된다. 닭고기와 달걀에 대한 기피 태도가 가장 흔한 곳은 아프리카이다. 집단 전체적으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성별, 나이, 사회적 지위, 달걀의 상태, 부패 정도 또는 장만되는 방식 등에 따라 기피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금지 조치가 가장 흔하게 시행되는 대상은 가임 연령의 여성들인데, 그 근거로는 불임이나 난산, 또는 태아에게 미칠 상해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콩고 지역의 야카족은 여성이 달걀을 먹으면 미쳐버리고 옷을 찢고 덤불로 뛰쳐나간다고 믿는다. 한편으로 특정한 요리법을 거치면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는데, 달걀을 썩히거나 혹은 병아리의 형태가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처리를 하면 먹어도 안전하다고 여긴다.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배아가 생긴 달걀을 선호하는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 닭고기와 달걀의 기피 현상의 원인으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종교적인 이유이다. 특히 힌두교도의 닭고기와 달걀에 대한 기피 현상은 닭고기와 달걀을 거리낌 없이 먹는 무슬림들이나 속죄 의례 때 가금을 쓰는 부족민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지으려는 희망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 시문스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힌두교도가 닭고기와 달걀을 기피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채식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닭이 찌꺼기나 동물(곤충이나 벌레)을 잡아먹는 습관이 있어 불결한 동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발생과 함께 달걀은 기독교적 상징 속에 포섭되어 있다. 특히 봄의 전령으로 부활절의 생명과 부활을 표현했다. 독일의 농부들은 부활절 달걀을 밭에 파묻음으로써 그 해의 풍작을 기원한다. 아프리카의 지굴라족 역시 풍작을 위해 새로 파종한 밭에 달걀을 놓아둔다. 이란에서 달걀은 새해 선물로 안성맞춤이며, 새해를 붉은 달걀 축제라고 부른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이 기피 현상이 둔화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슬림과 돼지고기, 힌두교와 쇠고기처럼 종교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고기
* 말고기 식용이 금지된 유럽에서는 소 전염병의 유행으로 육류 가격이 오르자 말고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 노르웨이에서는 여성들이 참관하는 한 제례에서 백마의 종마가 도살되고, 제례적인 거세와 말의 성기에 대한 음탕한 이야기가 제례 과정에서 읊어졌다. 어떤 가족의 짐말이 죽자 그들은 말가죽을 벗기고 그 고기로 요리를 해 먹었다. 그리고 그 가족의 주부는 말의 성기를 말려 보관해두고 자신의 신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장롱에 넣어두었다가 매일 저녁 가지고 나와서 거기에 대고 찬송가를 불렀다 한다.
말 공양과 말고기 식용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행되었지만, 그곳 주민들은 의약품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 외에는 말을 식량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말고기를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으며,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말고기를 먹었다. 북부 유럽에 기독교가 도입되면서 말고기 식용을 금지하는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대부분과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교회가 우세해지고 말고기 식용도 없어져갔지만, 아이슬란드인들은 교회에 승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변화를 거부했다. 교회는 이들을 파문하기보다는 말고기 먹는 관습을 유지해도 좋다는 면죄권을 부여했다. 실제로 일부 기독교 수도사들도 말고기를 먹었다는 증거가 있다. 유럽 북부에 말고기가 다시금 식량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식량 부족 때문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말고기 판매가 불법이었지만 빈민들은 말고기를 많이 먹었으며, 1866년에는 말고기 식용이 합법화되었다. 프랑스의 인텔리겐차들은 말고기 식용을 권장하기 위한 말고기 연회를 열었으며, 영국에서도 말고기 식용을 장려하기 위해 공식 만찬에 말고기를 내놓았고, 심지어는 말고기 소비 촉진 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말고기를 반대하는 편견은 이교도의 종교적 의식에서 말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먹는 행동에 대한 기독교의 반발 그리고 말이 차지하고 있던 높은 지위나 말의 신성성 및 신들과의 관련성에서 생겨났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말고기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실제 말고기 식용 관습은 점차 시들해져가고 있다.

낙타고기
* 에티오피아의 무슬림들은 낙타고기를 중요한 음식으로 여기는 반면 고원지대의 기독교 신자들은 불결한 낙타고기를 먹는 것은 무슬림의 관습이라 생각한다.
낙타가 최초로 가축화된 지역은 아라비아로 추측된다. 아라비아에서 낙타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며, 베두인족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는 “내 낙타를 잃었구나!”라고 애도한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는 낙타가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많을 때는 1,000마리까지 바쳤다. 이는 이런 희생제례가 고대 조로아스터교 이란에서도 역시 중요한 행사였음을 시사한다. 유럽에서 말의 도살과 식용이 이교도적 관습으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이슬람교가 세워진 이후의 근동지방에서는 낙타의 도살과 식용을 아랍의 종교와 관련된 것, 이슬람 제례와 거의 마찬가지인 것, 혹은 일종의 신앙 고백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낙타고기에 대한 거부는 근동 지방의 비무슬림 주민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슬람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낙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이슬람교의 신자라는 상징이 되었다.
개고기
* 모로코의 안지라 주민들은 개가 물을 마시거나 핥은 그릇은 뜨거운 물로 일곱 번 씻거나 그렇지 않으면 깨뜨려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 힌두교에서는 “개가 제아무리 갠지스 강에서 헤엄친들 깨끗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개고기 식용 관습은 과거 미국의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으며, 구세계의 동부와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제도와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구세계에서 가장 넓은 개고기 식용 지역으로, 중국으로부터 북쪽으로 우리 나라를 거쳐 동부 시베리아까지, 남쪽과 동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최소한 아삼 지방까지, 동쪽으로는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제도까지 이른다. 이 광대한 지역에 사는 모든 집단들이 개고기를 먹은 것은 아니며, 오랫동안 힌두교와 불교도, 그리고 무슬림과 서구인들로부터 개고기 식용 관습을 버리라는 압력을 받아왔다. 한국에서의 개고기 식용에 관해 시문스는 1988년의 일을 이야기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개고기 식용을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기 위해 간판도 없이 후미진 곳에 있는 개고기 식당으로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정부의 고위관료들도 있었다고 한다. 고대 이후 인간 사회에서 개가 차지하는 지위는 양면적이었다.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점에서 사랑을 받거나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체를 먹어치우는 불결한 식습관으로 인해 혐오스러운 동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체를 먹는 개의 습성으로 인해 개가 죽음, 질병, 죽음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이나 귀신 및 그런 것들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고대의 통념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고대 제례에서 개를 도살하는 행위의 배후에는 이런 연관성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개가 어느 정도의 존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개고기를 식품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통념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생선
* “혀가 없는 물고기를 죽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물고기가 도움이나 자비를 청할 수단이 전혀 없는 불쌍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 남부 아프리카의 반투족은 물에 사는 생물로 만들어진 식사에 참석하는 것을 마치 뱀 요리가 차려진 식탁에 앉는 것처럼 여겼다.
사하라나 동북부 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의 어느 곳을 막론하고 현대 아프리카의 생선 기피자들은 생선을 불결한 물뱀이라 여기며, 생선을 먹는 것은 비천하고 구역질나는 일이라고 한다. 인도에서의 생선 기피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아프리카에서의 이러한 반응과 유사하다. 둘째는 어떤 생물이든 생명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행동은 나쁘다는 종교적인 관념이다. 셋째는 신성한 물의 개념인데, 신성한 물에 사는 물고기는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결하다는 이유로 생선을 거부한다는 주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데,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건조 지역과 반건조 지역에서 발생하며, 그 모든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생선 기피자는 목축민이다. 불살생 원칙때문에 생선을 거부하는 태도의 근원지는 인도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불교는 생선 기피 현상을 동남아시아와 동부 아시아의 생선 의존적인 지역에까지 소개한 매개체였다. -
기마 퉁구스족(기마 에벤크족)(Levin&Potapov, 1964년: 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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