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1894.5.27~1961.7.1]

프랑스의 소설가.
원어명 Louis-Ferdinand Céline
본명 데투슈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저서 《밤의 종말에의 여행》(1932), 《분할불 방식의 죽음》(1936), 《기뇨르즈 밴드》(1944), 《전쟁》(1949), 《성에서 성으로》(1959), 《북부》(1960)

본명 데투슈(Louis Ferdinand Destouches). 파리의 변두리에서 출생하여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냈고, 독학으로 의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중상을 입고 아프리카와 미국을 편력한 다음 프랑스로 돌아와 빈민을 상대로 의사개업을 하였다.
1932년에 자서전적인 소설 《밤의 종말에의 여행 Voyage au bout de la nuit》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속어와 비어(卑語)를 곁들인 노골적인 문체로 일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후로도 강렬한 허무적인 사상을 바꾸지 않고 반체제·반유대의 입장을 관철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친독일적인 경향이 있다고 판단되어, 전범 작가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덴마크로 망명하였다.
1951년에 특사로 귀국하기는 하였지만 궁핍과 불우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분할불 방식의 죽음 Mort  crédit》(1936), 《기뇨르즈 밴드》(1944), 《전쟁 La guerre》(1949), 《성에서 성으로》(1959), 《북부 Nord》(1960) 등의 소설이 있으며, 사후에 작가로서 재인식되었다.

밤의 끝까지 여행을

 이 책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광인' 혹은 '천재'라 불리며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보편적 시대정신에 반하여 산사람들이며, 니체의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 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시대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기록된 예술가들은 영화 감독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피에르 파졸리니,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3번의 자살 시도 끝에 31세로 생을 마감한 시인 실비아 플라스, 20세기 음악게의 이단적 존재 작곡가 에릭 사티, 사진의 아버지 스티글리츠,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를 쓴 프랑스 시인 상드라르, 스페인의 영광과 상처가 된 시인 페데리코 로르카, 난쟁이와 거인등 '비정상적' 인물들을 피사체에 담았던 다이안 아버스, 무용의 신 니진스키 등 모두 17명이다.
이 책은 1998년 박가서장에서 출간되었다가 출판사의 운명과 함께 절판되었던 책이다. 이 책을 그린비에서 재출간하는 이유는 17명의 예?換湧?삶이 지금에도 여전히 큰 울림을 갖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이들의 삶의 궤적을 기록하되 단순한 연대기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장으로 그들의 고뇌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을 택하여, 자신의 시대와 불화하며 현재에 미래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이 마치 지금 여기의 삶인 듯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280여 장에 이르는 사진 자료도 빼놓을 수 없는 재출간의 이유다. 국내에서 흔히 보기 힘든 이 사진들만으로도 17인의 예술가들의 삶과 사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15. 루이 페르디낭 셀린, 밤의 끝으로 간 고독한 나그네

 미국 여성 작가가 쓴 독서론. 단계별로 인생을 변화시킨 책들을 그 당시 정서와 유행상품과 출판상황을 절묘히 결합시켜 소개하고 있다. 미국적인 정감과 시대적 소양을 좀 갖추고 있다면 눈에 더 착착 달라붙을 듯.독서에 대한 책들은 이미 여러 권 발간되었다. 우리가 기억하기에도 오래 전에 출간된 김현의 책읽기, 장정일의 독서일기 이외에도 최근에 출간된 이권우의 책과 다치나바의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은 나름대로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목적론적 책읽기, 혹은 실용적인 책읽기라 말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물론 이 책들의 저자들 또한 엄청난 독서광들이기는 하지만, 이 책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직업적이거나 실용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책 속에는 어린 시절의 책읽기가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거나 언급되어 있다 하여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1. 이 책은 체험론적 독서론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독서가 성인이 되어서도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어린 시절 살던 도시의 분위기, 가족 이야기, 학교 생활 등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자신의 독서와 어떻게 조합을 이루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그 때에도 언제나 마음 속에는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을 배회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과 같은 구축함은 없나니/우리를 땅 저 멀리 데려가노니/페이지와 같은 강좌는 없나니 /활기찬 시위."와 같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하기도 하다.
이런 이러한 이 책의 체험적인 독서론은 저자가 미국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 사회는 목적 없는 독서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발전의 도구 이상으로 간주하는 독서를 의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 윈프리의 예를 들면서 독서는 혼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미국사회에서 혼자라는 것은 고독한 자로 연결되고 고독한 자는 패자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말한다. "나는 우월감이나 발전을 위해, 심지어 배우기 위해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이 지상에서 그 어떤 행위보다 책읽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읽었을 뿐이라"고
2. 이 책은 여성이 쓴 독서론이다. 이 점이 이 책이 앞에서 언급한 책들과 다르다. 그리고 대단히 문학지향적 독서론이다. 여성의 독서론과 문학지향적 독서론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면 여성들은 문학지향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데, 함부로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성이 쓴 독서론과 문학지향적 독서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부분은 문장이 대단히 섬세하고 감성적이다는 사실이다. 이 책 속에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나는 어린시절 여행을 꾸몄던 방식대로 오늘날 여행한다. 비행기 안에서 혼자 행복하게 책 읽는 것, 그런 것이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여행이다. 어린시절의 내 자아가 날개를 가질 수 있다면 오직 그녀의 영혼만이 높이 솟구쳐오르게 하고 싶다. 책이 비행기이며, 기차아며, 길이다. 책은 행선지이며 여정이다. 책은 집이다"처럼. 그래서 읽기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쉽게 책읽기에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문학지향적이기 때문에 이 책 속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 데 이러한 사실 또한 이 책이 전혀 낯설지 않다.
3. 이 책 속에는 간략하긴 하지만 출판과 독서의 역사도 있다. 다시 말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것도 나열식이 아니라 작가의 비판적 안목을 곁들여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한번 보자.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책은 기껏해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이후 2500년 동안 그가 보낸 경멸이 활자화된 페이지 위에서 다시 불붙는 것을 보았다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읽은 일군의 독자들이 그들이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독서를 통해 배웠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그 위대한 사상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라고 쓰면서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3장)
"책의 죽음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책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분명하다..... 우리가 단지 정보를 알기 위해 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맛보고 싶고 그것을 가지고 다니고 싶고 우리의 팔 아래서 책의 무게를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라고.
4. 이 책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저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계기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애너 퀼들런은 독서가 마치 두 개의 막대기를 비벼서 불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독서 행위와 전혀 그럴 듯하지 않은 단조로운 과업이 열과 빛을 가져다준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면 이점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멈춤이라는 신호판, 요리 비법, 동일한 문구로 복제된 편지, 포장할 때의 지침서와 같은 것의 신비에 수 년 동안 망해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상징이 단어를 만들고 단어가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감정과 장면을 만들고 마음의 눈으로 상상된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동화 작가인 로이스 로우리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그 때의 흥분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각각의 글자가 소리를 가지고 있고, 그 소리들이 모여 단어를 만들며, 그 단어들이 문장이 되고 문장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최초로 깨달았을 때의 그 흥분된 감정을 말이다"
그러면서 책이 드물던 시절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사람들을 회상한다. 그 사람들은 책을 그나마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로푸르노 부인), 어머니가 좋아했던 리더스 다이제스트 축약본 이야기, 책을 빌려보았던 도서관 등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로푸르노 부인의 지하서가에서 책을 빌려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것이 열 살 무렵이었다고 밝히면서 그 곳에서 독서를 통해 키워갔던 꿈을 아름답게 펼쳐보인다.
5. 마지막으로 저자는 독서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그녀는 독서의 기능에 대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암시한다.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바로 그 책 자체였으며 또 다시 읽을 수 있고 변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변했을 따름이다. 바로 이점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책을 우리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그 책의 유용성과 사회성 등등을 크게 다르게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든다. 이 책은 미국에서 가장 논란을 많이 불러 일으킨 책으로,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세대간 입장의 차이를 통해 독서의 기능에 설명한다. 이 책에 대해 사춘기 세대들은 그들 스스로를 보다 인간적으로 느끼도록 해주고, 스스로를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처럼 느끼지 않도록 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많은 사람의 엄청난 찬사를 불러일으켰던 사실을 대변한다. 이와는 반대로 이 책이 미국의 도서관 협회의 학교 도서관 금서 목록에 늘 올려져 있는 사실을 통해 독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이뿐 아니라 저자는 교육 받은 자들의 독서에 대한 편견(독서에도 올바른 방법과 그릇된 방법이 있다는)과 문학비평가들의 역기능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며, 대학에서의 목적성만을 위한 독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다. 이와는 반대로 독서의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말한다. 독서의 경이감의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주며(교육의 관점에서나 사회의 정신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고독을 줄여줄 수 있다고도 한다. 책의 기능이 무엇이든 결론적으로 저자는 말한다.
"멋지고 훌륭하게 짜여진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행위와 영적인 -
"소설은 자동차ㆍ영화ㆍ텔레비전ㆍ술과 경쟁할 수 없다"고 프랑스 작가인 루이 페르디낭 셀린이 1960년대 토로했다.

 책은 누구나 읽지만, 어떻게 읽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 문학 비평계의 거목으로 40여 년간 문단의 중심에 서 있는 저자 헤럴드 블룸은 이 책에서 우리에게 수많은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영국 BBC 방소에서 발표한 '세계 문학 100선'의 대부분이 저자에 의해 새롭게 읽혀진다. 창조적 읽기란 곧 '책읽기의 즐거움'과 통하는 듯하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열정 넘치는 이 책 서두에서 독서의 즐거움과 효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블룸은 40여 년 동안 문학을 향한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올바른 독자가 되는 방법 등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다. 빠르고 손쉬운 전자 매체에 의해 독서 행위가 빛을 잃어가는 오늘날, 그는 비평가와 교수의 입장을 떠나 많은 책을 섭렵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경험을 빌어 지혜의 원천이 되는 작품들을 탐구했다.
모든 논쟁을 떠나서 블룸은 외로운 독자들에게 다가가 가장 순수한 목적, 즉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삶을 보다 더 확대하기 위해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문학적 연관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독자들이 다양한 문학 양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몰두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블룸은 이 책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인 오스틴,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 찰스 디킨스, 윌리엄 포크너 등 인기 작가의 작품들을 심도있게 논의하면서 단편, 시, 희곡, 장편 등 각각의 장르를 통한 다양한 지적 즐거움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지침뿐만 아니라 독서의 미학적인 즐거움, 개인의 확대 및 자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흥미롭고도 복잡한 등장 인물과의 교류 등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블룸의 문체와 통찰력은 오래된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되살리는 한편,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기쁨을 줄 것이다. -
21 루이 페르디낭 셀린, 『밤의 끝으로 여행을』

 타자를 통해 자아에 이르는 길
‘타자성’의 문제는 현대 서구 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 스캔들 중의 하나이다. 근대 서구 사상사와 주류 문화를 이끌어왔던 합리적 ‘이성’의 신화, 즉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시키고 동화시켜온 동일자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늘 이성의 그늘로 황급히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타자’가 해명해 내야 할 수수께끼로 당대 사상사의 무대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커니는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정상성(normality)을 구성하고 그 범주 안에 ‘나’와 ‘우리’를 포함시키기 위해 어떻게 ‘그들’, 즉 타자를 만들어내고 배제시켜왔는가를 추적해 들어감은 물론, 현대 주요 사상가들의 타자성에 대한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서구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신화 및 종교, 인류학, 문학, 철학의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나스 · 데리다 · 리오타르 · 크리스테바 · 지젝 · 하이데거 등이 수행한 타자성 연구의 성과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들 사상가들의 선배 격인 칸트와 프로이트도 등장한다. 커니는 타자성 연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이들 독창적이며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매우 능숙하고 노련하게 다룬다. 현대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와, 우리로 하여금 타자가 재현되는 방식을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몸소 체험하게 해줬다고 할 만한 미국 뉴욕에서의 9 · 11 테러 사건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나지 못함은 물론이다.
서사적 이해의 필요성
저자는 우리가 제대로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사, 즉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자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존재이자 선과 악, 신성과 악마성의 경계에 선 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계에 서 있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하고 설명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자는 특히 타자성의 주요 키워드로 이방인 · 신 · 괴물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 인간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모습들의 투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방인 · 신 · 괴물의 모습을 서사적 이해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그 이면에 감추어져온 타자성의 ‘진실’을 해석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어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사적 이해는 서로 적대적인 양극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사닥다리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저자는 고대 신화와 종교에서부터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셰익스피어의[햄릿]과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등 고대와 현대의 희생양 서사들을 망라하며 자신의 논의를 이어간다. 이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도의 길로서의 ‘판별의 해석학’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크게 레비나스 등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외재성과 크리스테바 등의 접근방식인 완전한 내재성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극단적인 양자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길을 통해 타자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도의 길로 제안하는 것이 바로 판별의 해석학이다. 저자는 고대 미노타우로스에서 중세의 괴물, 그리고 포스트모던한 이방인들까지 흥미로운 예들을 통해 인간의 자아 그 자체가 자주 기괴한 요소들을 담고 있음을 논의한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이방인과 신, 괴물이 단지 신화나 판타지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문화의 무의식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타자가 어떻게 깊이 반향하는지 더 잘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공포와 욕망이 외부 세계에 어떻게 명백하게 드러나는지 이해할 수 없고, 또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배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열쇠는 우리의 괴물들을 죽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괴물들이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고 타인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멈추게 만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누구라도,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아포리즘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괴물을 포용한다는 것이 그들을 우리의 평온한 저녁식사에 초대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환대’할 필요가 있는 괴물들도 있지만, 그 괴물들은 다른 이들의 투쟁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할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부해야만 하는 악은 분명 존재하며 따라서 그러한 악을 판별해 내는 것은 타자성을 다루는 모든 연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차이’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 Ferdinand Celine)은 현대문학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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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2006-03-0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서재는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아요. 좋은 하루되세요...

물만두 2006-03-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