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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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 집은 개천가에 있었다. 어릴 적 그 개천가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공놀이라도 하다가 개천 아래로 공이 떨어지면 그 공을 주우러 내려가야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그 개천물이 시커매진 것이. 그래도 우린 그 개천 물로 들어가서 공을 꺼내오곤 했다.
내가 4살 때 이사 온 그 무렵에는, 아니 그 이전에는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 개천 물에서 빨래하고 목욕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더러는 개천 다리 밑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집에서 22년을 살았다. 사는 동안 점점 그 개천을 더러워지고 악취를 풍기고 썩을 대로 썩어 아무도 그 아래로 내려가는 아이들이 없었다.
스물여섯 해를 보내고 떠나온 그 개천은 지금 그 위로 고가 도로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 집은 철거되었지만 개천은 남아 그래도 냄새는 풍기더라고 얼마 전 그 주변을 다녀온 동생이 말해줬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세월이 흘러 변하리라 믿었던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또 세월에 그래도.. 그래도... 라는 미련을 남긴다. 발자국을 찍듯이.
시인의 시는 내게 자신의 발자국이었다. 하나하나 푸념 섞인 투정이었다.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 맛을 알지 못했던 누구나의 청춘과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달라는 배짱과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을 알아보는 성찰, 그리고 벌레와 손가락의 환상까지...
아직 어리다고 보니 나보다 두 살밖에 안 어리네. 그래도 내겐 좀 더 성숙한 시인의 앞이 보고 싶다. 십년 뒤 다시 쓰여 진 그의 시는 분명 오늘 내가 읽은 시와는 다를 것이다. 그때 어쩌면 나는 오늘의 이 시들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대해본다. 구겨진 자화상속에서 귀를 자른 고흐처럼 얼마나 멋진 시를 써 보일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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