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 청목정선세계문학 7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신동진 옮김 / 청목(청목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환상과 암시의 미로 속에서 우리를 거울에 비쳐 보았을 때...

이 책을 산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가브리엘 마르께스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단지 그 당시 내가 몹시 우울했고, 불안정했으며,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알뿐이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이 책을 읽었다. 작품은 난해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공감이 가지 않는 행동만을 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끝도 없는 환상과 암시의 미로를 헤매 다녔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업에 의한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치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처럼 가문의 몰락이 예언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고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의 결핍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애정은 무엇인가. 애정은 고독을 치유하는 약인가. 하지만 백년동안의 고독했던 한 가문의 끝은 근친상간에서 온 파멸이었다. 99년을 내내 애정결핍으로 고독하던 가문이 마지막 1년을 진실한 사랑으로 채워가려는 순간 그것이 부도덕한 근친간의 애정이었다는 이유로 신기루처럼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한 일이다.

인간들 하나 하나의 죄가 쌓여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몰락과 멸망이라는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몰아 넣는 것이 고독의 끝이었고 또한 치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단지 남보다 약은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고, 남과 같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이다. 시대에서 밀려나 주변을 서성이는 고독. 부모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어떻게 말 할 수 있는 가. 단지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죄라면, 그래서 벌을 받아야한다면, 지금도 존재하는 많은 고독들 또한 그러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 까.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냥 방치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 까. 우리가 그곳에 속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고독을 잉태하는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어느 한 가문의 슬픈 얘기만은 아니다.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얘기도 아니다.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고 크고, 작게 이어지는 일이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전병처럼 은밀하게 지속되는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막지 못 하는 일이기도 하며 치유되는 가운데 보균자는 항상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가 속한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문명이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마지막 아이의 돼지꼬리를 그려본다. 그가 개미들에게 파묻힌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를 기억한다. 예언에만 몰두하던... 그리고 멈추지 않고 아마란타 우르술라의 내부에서 흘러내려 사랑만을 원하고 죽음으로밖에 막을 수 없었던 시뻘건 피의 외침을 상기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의 세속의 잣대로 판단될 수 없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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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2005-06-0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재밌으셨다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도 읽어보세요. 벌써 보셨을라나? 제 생각에 만두님이 좋아하실듯 한데..^^ 저도 좋았구요. 물론!

물만두 2005-06-0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이 책 읽느라 저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님이 말씀하신 책 함 보기는 합지요^^ 살펴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