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고스트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작품들은 첫 작품만이 호러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다음 작품들은 환타지적 느낌과 함께 인생을 추억하게 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공상의 세계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고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만들고 사라져 가는 것들, 나이를 먹고 그저 스쳐 지난 일들이 어떻게 공상과 환상의 터널을 지나 공포로 인식되어 가는 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 작품 <신간 공포 걸작선>이 공포의 패턴을 따른 전형적 작품이라고 하면 마지막 작품 <자발적 감금>은 이 모든 작품들의 플랫랜드라고 할 만한 현실적 환상을 공포로 극대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신간 공포 걸작선>은 공포 잡지 편집자가 자신의 마음에 든 공포 소설을 쓴 작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로 소설을 읽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할 만한 공포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고 <20세기 고스트>는 유령이 나타나는 영화관에서 평생 영화관과 같이 늙어간 한 남자에 대한 따뜻하고 애뜻한 시선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팝 아트>는 풍선 인간이라는 독특한 묘사로 인간의 고립과 소년들의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카프카의 <변신>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그 시대와 다른 현대 가정의 문제점과 변신한 주인공의 정서,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면 곤충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변이되듯이 마찬가지로 그것을 작품에 잘 표현하고 있다. 카프카의 시대에는 <변신>이 어울리지만 현대에는 이런 '변신'이 더 잘 어울린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물론 카프카의 시대에도 변신은 슬픈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밤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아들들의 이야기로 오마쥬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은 작품이고 <집보다 나은 곳>은 읽으면서 정말 이것은 철저한 공상이기를 바란 작품이다. 집보다 나은 곳을 찾아 그곳을 편하게 생각하게 되는 현대인들이라니, 가족에게 보살핌이나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은 그 어떤 공포보다 더 심각한 공포로 다가왔다. <검은 전화>는 납치 감금된 소년이 겪은 일을 쓴 작품이고 <협살挾殺 위기>는 한 남자의 꼬여만 가는 인생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 망토>는 어린 시절 한번쯤 꿈꿔봤을 법한 이야기의 비틀린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그 성인은 정신적으로 결코 아이에서 더 성숙해지지 않은 현대의 몸만 자란 어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은 작품이다. 

<마지막 숨결>은 이 단편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적절한 환상과 호러가 결합된 잔잔하면서도 소름 돋게 만드는 묘한 면이 돋보인다. 침묵의 박물관이라는 이상한 곳에 들어온 가족과 그곳의 관장인 전직 의사, 그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은 유명인도 있고 무명인도 있지만 모두 죽기 직전 마지막 숨결을 담은 것으로 그는 그것들을 전시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그 침묵을 듣게 한다. 무섭지만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기이하게 듣고 싶어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세상 어딘가 이런 박물관도 어쩌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발적 감금>은 조금은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동생과 문제아 친구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형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글은 그 형이 쓰는 글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자신의 친구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 쓰여 있는데 이 글에서 처음 플랫랜드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2차원세계를 다룬 작품을 상자라는 정사각형 모양의 것으로 잘 묘사한 기발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드윈 애벗이 쓴 수학 소설에서 시작된 것이 SF와 환타지 소설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니 모든 학문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현대인의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시가 외치던 마지막 마법의 주문은 현대에 와서 공포로 바뀌었다. 집은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안전한 곳이 아니다. 집은 떠나고 싶은 곳이고 떄론 못 떠나게 가두는 곳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집들은 대부분 공포를 동반한다. 집이 그렇고 그 안에 사는 가족이 그렇다. 누가, 무엇이 먼저 변한 건지 모르겠다. 물론 때로는 떠난 이들이 그래도 돌아올 곳이 되어 주기도 한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환타지로 잘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작가는 오즈의 마법사의 마지막을 못봤던 이모젠처럼 우리 모두 오즈의 마법사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바꿔주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집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조금은 색다른 조 힐의 단편들을 읽었다. 어떤 작품은 전형적 공포소설이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환타지였고 어떤 작품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심심한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환타지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은 잘 표현하고 있다. 조 힐은 평범한 가운데 현대인의 공포와 환타지를 담아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다. 그건 놀라운 능력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여러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그가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한 것이다. 나는 그가 아버지보다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기를 바란다. 청출어람, 징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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