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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 ㅣ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좋아한다. 작가를 좋아하는 만큼 <여성 혐오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속에 작가가 그리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노골적인 이야기를 읽어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마치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이 여성을 심하게 비하하기 위해 과장해서 쓴 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글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 작가가 표현한 여성의 싫은 면에 대한 여성성의 왜곡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후기에서 작가 본인이 여성 혐오자였다는 걸 보고 역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더니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결혼을 이용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손>, 종족 보존과 남자들의 성적인 상대로 여성의 삶은 시작되었고 여성의 질투로 끝이 났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유쾌한 원시 여인 우나>, 소설가인척 재능도 없으면서 소설을 쓰는 <여류 소설가>,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예술을 전락시키는 <예술가>, 남자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동식 잠자리>,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적 매력에 눈을 뜬다고 말하는 듯한 <완벽한 꼬마 숙녀> 등을 보면 팜므파탈을 조각내서 해부한 듯한 느낌을 준다. 세상엔 온통 남자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여자들뿐인 것 같은데 뼈있는 이야기들이라 시니컬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만큼 작가가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는 반증이지 싶다.
이렇게 1975년에 나온 단편집 'Little Tales of Misogyny'를 읽고 나면 1979년에 나온 'Slowly, Slowly in the Wind'가 펼쳐진다. 전혀 다른 성격의 단편집 두 권을 한 권으로 엮어 놓다니 하는 생각도 들지만 뒤에 나오는 작품들 중에도 여성 혐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니 아주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단편집 <바람속에서 서서히, 서서히>는 작가의 장기인 완전 범죄와 광기의 살인, 그로테스크한 공포, 그 속에 일상적인 공포와 자연에 대한 공포를 나누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쓴 점은 작가의 능력이 얼마나 다양한 지를 보여준다. 또한 인간에 대한 서글픈 연민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만나게 된다. 여기에 속한 열 두편의 단편만 읽는 것으로도 이 단편집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 중 몇 작품을 언급하자면 <연못>은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되서 아들과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한 여인이 집을 청소하다 마당의 연못의 수초 제거에 열을 올리며 시작되는 공포를 짧지만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은 이사한 집에서 혼자 있다가 강도를 만난 여인의 그 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람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남자가 결정적으로 폭발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 끔찍한 새벽들>은 너무 젋은 나이에 아이들을 넷이나 낳아서 아이들을 학대하며 사는 여인의 끔찍한 새벽에 대한 이야기다. <윌슨 대통령의 넥타이>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대표적인 단편으로 여러번 본 작품이다. 공포 밀랍 인형관을 너무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담고 있다. <기이한 자살>은 오래전 자신과 사랑하는 여인을 이간질하고 그 여인을 차지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깨진 유리>는 노인에 대한 강도와 그 강도에 맞서 싸운 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무를 쏘지 마시오>는 미래에 인간이 자연에게 잘못한 것이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지를 그리고 있는 간단하지만 인간의 오만에 경고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의 날카로움은 마음을 베고 그 마음을 파고 들어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공감을 하거나 공감하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랄하고 거침없는 이야기 속에서, 때로는 방황하는 영혼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 같은 이야기 속에서, 저것이 어쩌면 내 모습이거나 또 어떤 이의 모습이리라는 생각 속에 빠져들게 하고, 그래서 때론 공포를 느끼고 때론 서글퍼지고 때론 화가 나게 만드는 작품들은 그런 흡입력으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작가의 작품은 완벽, 그 이상이다.
276쪽에 있는 <섬으로>에 나오는 글 '상상과는 달랐지만 막상 그곳에 있어 보니 이상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섬에 발을 들인 순간에 느끼리라 상상했던, 이미 익숙한 곳이란 느낌도 들었다.'를 작가에 대한 표현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글은 상상과 다를지라도 읽어보면 이상하지 않다. 책을 읽을 때 느끼리라 상상했던, 그 이상의 느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네번째 단편을 읽고 그녀에게 하고 싶고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이제 단편을 읽었으니 리플리 시리즈가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