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메피스토(Mephisto) 4
카렌 두베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자신이 자칭 시인이라 생각하는 한 남자와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 그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건달 친구를 통해 폭력배 두목의 자서전을 쓰기로 하고 구동독의 한적한 곳에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한다. 이사하는 날부터 비는 내리고 남자는 글을 쓰기 위해 애를 쓰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몰려드는 달팽이와 전쟁을 벌여야 하고 이웃에 사는 자매와도 미묘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내 죄를 씻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책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그 비 때문에 집은 무너지려 한다. 이것은 파괴와 파멸의 전조다. 그 집의 이웃에는 두 자매가 산다. 언니는 변태성욕의 뚱보고 동생은 레즈비언이다. 그리고 그 마을의 가게 주인은 꿈을 꾼다. 구 서독처럼 자신들의 마을이 나아질 거라는. 서로 각자의 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절망이 비가 되어 내리고 그리하여 서로에게 단절만을 남긴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된 남자는 보복을 받게 되고 여자는 남자 대신 받는 보복을 자신의 죄 값이라 여기며 남자를 떠나 집으로 간다. 남자는 늪에 빠져 안식을 찾게 되고 허물어진 집과 또 다시 둘만 남은 자매는 여전히 그곳에 산다. 삶이란 이렇게 지겨운 것이다. 쌓았다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매일이 그렇게 쌓이고 허물어지고 반복하다 땅 밑에 묻혀서야 비로소 평화로울 수 있는. 그래서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선 한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리라.

비는 모든 것을 씻어 가길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다. 씻어 갈 수 없는 것, 버려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바람이다. 외딴 집은 고립과 단절을 상징한다. 남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고립된 마을에서 펼칠 수 있으리라 꿈꾸고 여자는 어린 시절 자신의 행동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증명하기 위한 비상을 꿈꾸고, 마을에서 고립되어 사는 자매는 자신의 동성애의 반려자를 꿈꾸고 구 동독 가게 주인은 부자와 자기 만족을 꿈꾼다. 그것이 한낱 꿈일 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남자는 깊은 늪 속에 가라앉고 만다.  

이 작품에는 모든 폭력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 폭력이 난무하는 늪지의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마을에 구원의 손길이 뻗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개의 이름을 노아라고 붙였다. 하지만 성서에서 그랬듯이 노아만이 구원을 받는다. 아니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일까. 폭력은 또한 단절과 고립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비와 안개라는 자연의 폭력, 포주와 그의 부하의 폭력, 남자라는 남성성이 가지는 희한한 폭력과 그 폭력에 무너지는 허무한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 그리고 여자들의 우정과 결별, 부모가 자식에게 가하는 폭력, 그리고 너무나 무기력한 우리들.

모든 것이 폭우에 쓸려 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가 내리게 만들지만 그 정도로 쓸려 나갈 인간의 잔인함이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늪과 달팽이와 비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처럼 폭력이라는 인간의 근원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노아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고, 자신보다 힘이 세다 판단되면 복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용하고, 그리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미련 없이 떠난다. 붕괴되어 매몰되기 전에.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나은 길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산다는 건 자꾸만 헛디디며 안개 속을 헤매다가 결국 늪에 빠져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까. 그러니 꿈꾸지 말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버려도, 버려도 다시 몰려오는 달팽이 군단은 그들의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들의 허기와 같고 인간의 관계는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폭우가 쏟아져 결국 집은 무너지지만 진정 무너진 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그들의 꿈과 욕망뿐이다. 비가 온다. 책 한 권을 쥐어 짜면 과연 얼마만큼의 비가 쏟아질까. 아마 끝도 없으리라. 이 책 자체가 비이기 때문이다. 결코 그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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