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도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창해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중학교 때 읽었다. 그 시 한 구절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간 숙녀..."라는 글 속의 버지니아 울프만을 기억한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도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작품 속에 만연한 정신병적인 집착을 발견하고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었겠어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일까. 나는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알고있는 모든 사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읽기에는 부담이 되는 작품이었다. 요즘 내가 즐겨 읽는 추리소설이나, SF소설과 비교하면 재미 면에서는 게임이 안 된다. 물론 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이런 작품과 비교한다는 것이 교양 없는 짓이겠지만, 영화에서의 그 올란도의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이 뇌리에 자리잡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손대지 않았을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페미니스트 문학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올란도라는 인간이 4세기 동안 남자와 여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연하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올란도가 결국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한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 여자로서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선택을 여성으로 결정한 것은 놀랍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자보다는 남자의 삶이 더 가치 있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의 삶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올란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4세기동안 간직한 '떡갈나무'라는 시의 의미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결혼과 출산은 무엇이고, 여왕의 영접과 달은? 나는 올란도는 자연과 결혼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을 떠나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정체성의 확인과 그 과정 안에서 올란도는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콘스탄티노블의 집시의 말처럼 자연 안에서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망막한 상념 하나가... 그러므로 내게는 올란도란 버지니아 울프의 분신이라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올란도처럼 극단적인 삶을, 남자로서의 삶과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보면 인간이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나뉘어 살아간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페미니즘 문학이라기 보다는 자연주의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 안에서 내가 많이 가졌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 한 문장에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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