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간 헌 책방에서 책을 몇 권 샀었다. 펄벅의 <대지>는 아버지가 읽어보라고 권하신 책이었고 내가 고른 책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을 고른 이유는 난장이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인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라는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그 책을 모두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분노했을 때처럼 억울하고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광장>이 50년대 분단의 비극과 사상의 단절을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6,70년대 가난의 비극과 사랑의 단절을 그린다.

그때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노동문학이 무언지도 몰랐던 당시 이 책은 내게 노동문학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비극을 다룬 작품으로 느꼈을 뿐이다. 난장이와 그의 자식들의 결코 변하지 않는 삶. 그리고 가진 자의 횡포. 그 극명한 대비가 우리의 슬픔이었고 현실이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난.쏘.공에서의 사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더욱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지 모르겠다.  

한국 노동문학의 대표작! 난장이 아버지와 그의 자식들의 가난한 삶, 70년대의 착취하는 고용주와 끝없이 일해도 나아지지 않고 착취당하기만 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학생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아가면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변하지 않도록 이 책을 위해 우리 사회는 절대 달라지지 않겠다고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 인간 사회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인냥 오늘도 세상은 그들을 내몰고 있다. 우리 또한 그들이 되지 않기 위해 버둥대고 있을 뿐이고.

이 작품을 보면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고 그 길이 그 길인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살아가는 다람쥐일 뿐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느낄 뿐이다. 출세하지 못하는 사람은 밟혀도 소리내면 안 되는 것이다. 난장이가 작은 공을 쏘아 올린다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대답은 없다. 사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약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만을 만들고 그 메아리에 상처 입는 것은 약자 자신일 뿐이다. 약자로 남아 하늘에 주먹을 휘두를 것인가, 아니면 강자로 편입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인가. 길은 둘 뿐이다. 아니면 외면하고 묵묵히 살던가.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분노는 그저 분노일 뿐이었다. 이 작품을 많은 사람이 읽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강자의 편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강자가 되고 싶어한다. 약자는 좋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전진하고 나아진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환상을 품고 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상음 깨지고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래도 난장이는 작은 공을 쏘아 올릴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니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 그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언제까지 책꽂이에 꽂아 두고 기억할 수 있을지. 하지만 달나라는 여전히 멀고 그곳에 발을 디딘 자들도 행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의 사랑은 환상인 듯 하다. 요즘은 처음 이 책을 잡았을 때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고 느껴진다. 이 책은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환타지를 다룬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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