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여름
미쓰하라 유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표지와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다. 열여덟이라는 나이, 그리고 그 해 여름 어떤  일이 있었는 지 궁금하게 만드는 제목과 네 개의 작은 화분과 끝에 다리만 보이는 쓰러져 있는 듯한 사람의 뒷 모습이 너무 밝은 햇살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읽고 싶게 만들었다. 네 개의 단편안에는 네 가지 꽃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꽃의 꽃말에 따라 사건은 전개된다. 일상의 소소한 미스터리에서 조금 심각한 사건까지 다양함을 꽃말이라는 소재로 작가는 이야기를 펼쳐 보이며 꽃처럼 손짓을 한다. 

표제작이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 수상작인 <열여덟의 여름>에 등장하는 꽃은 나팔꽃이다. 네 개의 나팔꽃 화분. 그리고 꽃말은 '기쁨, 결속, 덧없는 사랑'이다. 이 중 어떤 꽃말을 적용해도 된다. 처음에는 덧없는 사랑이 어울리는 작품이라 생각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 가지 모두 포함된 작품이었다. 이제 막 열 여덟이 된 미우라 신야는 재수생이다. 조깅을 하던 중 그림을 그리는 스오 구미코에게 반해 아예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공부방을 옮기기까지 하며 그녀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녀의 방에는 네 개의 화분이 있다. 이제 싹이 나려고 하는 화분이다. 그 화분에 붙은 이름은 아빠, 엄마. 그, 그녀다. 독특한 디자이너 연상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신야와 마음을 열지 않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구미코가 벌이는 잔잔한 러브 미스터리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찾아온다. 그 첫사랑이 독특한 사람도 있다. 첫사랑은 너무도 우연히 뒤에서 날아오는 돌멩이에 비유되는 숙명같은 것이라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첫사랑으로 사람은 성숙해진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고 하니까. 하지만 과연 성숙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열여덟 청년의 어쩔 수 없는 첫사랑을 통해 미스터리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읽어보면 그래도 사랑했음으로 얻은 기쁨, 가족간의 결속, 덧없는 사랑일지라도 했음에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읽으면 자신의 지나간 첫사랑이 생각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사랑이든...  

<자그마한 기적>에 등장하는 꽃은 금목서다. 금목서의 꽃말은 '당신의 마음을 끌다'라고 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을 돌봐주시던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가시자 처갓집이 있는 오사카로 이사를 와서 아들을 키우게 된 서점에 근무하는 한 남자가 한 동네의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생기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다룬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기적은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일도 기적이라 생각하면 인생을 뒤바꾸는 커다란 기적이 되고 간과하고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기적도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제목은 자그마한 기적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끄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지나치지 않고 잘 받아들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사랑보다 더한 기적이, 가족을 다시 만드는 일보다 더한 기적이 세상에 어디있으랴. 살아 있는 한 언제나 기적은 찾아오게 되어 있음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형의 순정>에 등장하는 꽃은 헬리오트로프다. 꽃말은 '성실, 헌신, 그리고 사랑이여 영원하라'라고 한다. 제멋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 부모님도 포기한 형은 연극을 하고 있다. 재능은 없어보이는데 연극에 미쳐 있다. 형 때문에 동생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불만이지만 가족을 위해 삐뚤어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제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형이 중학교때 담임 선생님 댁에서 만난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만다.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마치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래도 형만한 아우없는 법이다. 누군가는 성실하고 누군가는 성실하려 애를 쓰고 누군가는 헌신하고 모든 사람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고 또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행복해야 행복한 눈으로, 마음으로 남에게 너그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형의 연극이 빛났던 것은 형이 행복을 아는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동생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조금 다르게 살아간다고 그 사람이 성실하지 않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내게는 형의 순정이 꽃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노센트 데이즈>에 등장하는 협죽도의 꽃말은 '주의, 위험'이다. 학원을 운영하는 고스케는 아내와 함께 처가집에 살고 있다. 장인이 운영하는 학원을 함께 운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갑자기 허리를 다친 고스케 앞에 예전에 학원을 다녔던 후미카가 나타난다. 그리고 잠깐 학원을 다녔던 다카시의 죽음을 알린다. 마을에 잘 알려진 두 집안의 비극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 된 후미카가 고스케는 걱정이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미스터리다운 작품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섬뜩한 추리 소설을 읽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면서도 다친 아이들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는 까닭에 고스케처럼 앞으로 나서 위로하기가 주저되지만 한번 실패를 경험한 고스케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애쓰는 모습에서 상처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드러낼때 세상에 누군가 그 상처를 어루만져줄 사람이 있는 이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면 나는 과연 고스케처럼 할 수 있을지, 누가 내게 고스케처럼 해줄지 생각해봤다.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이야기하는 슬프지만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다. 

미스터리이면서 사랑 이야기고 또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같으면서도 그 안에 평범한 인간이 알아야 하는 삶에 대한 자세가 모두 담겨져 있는 무게를 잡지 않으면서 진지한, 잠언집처럼 딱딱하지 않으면서 지혜로 가득 찬 그런 작품이다. 누군가의 비밀에 귀 기울이는 일은 내 안의 비밀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을 통해 내 마음이 내게 하고자 하는 비밀 이야기,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이야기에도 구기 기울여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 잘 살아보자. 산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다! 꽃이 전해준 고운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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