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왜 보게 되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은 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생각 중이다. 일본의 카프카로 불린다는 아베 코본지 고본지 암튼 이 작가의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은 <실종 삼부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오오~ 실종이라, 이것은 추리소설의 소재가 아니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심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와 비슷한 작품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일본의 카프카가 추리소설을 썼을 리 없고 처음에는 그나마 추리소설처럼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SF적인 요소가 더 많은 철학적인 내용이라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 남자는 도대체 얼굴이 뭐기에 얼굴 하나로 인해 자신의 생활이 이렇게 달라지고 남들의 시선이 괴물을 보듯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모습마저도 그는 자신을 평소처럼 대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있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얼굴에 사람의 가면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면을 제작한다. 새 얼굴을 만들어 타인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결과를 남자가 아내에게 남긴 노트의 이야기다. 우리는 남자가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는 셈이다. 마치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아마도 작가가 이런 형식으로 얼굴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인식시키고자, 소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나는 주인공에게 공감했다. 무언가를 잃어본 이는 처음 당황하게 되고 남에게 상처받게 되고 자신을 점점 고립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얼굴뿐이 아니다. 눈과 귀일수도 있고 몸 전체일 수도 있다. 또한 정신일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는 주인공의 오만 속에서 단순하게 자학으로 바뀐다는 생각이 드니 결국 잃은 것은 얼굴이 아닌 자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잃어버린 자신을 누가 인식하고 인정해서 소통의 통로를 열겠는가? 그는 소통의 통로를 닫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이미 갇혀버린 사람이었다. 그에게 노트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고 타인의 가면은 피에로의 우스꽝스런 가면일 뿐이다.

태초에 거울이 없어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때 인간의 다른 사람의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소통했다. 그것이 인간에게 얼굴이 인간의 모든 것임을 나타내게 만든 것은 아닌가, 오랜 시간 인간에게 그런 것들이 쌓여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니 더 나아가서 얼굴의 아름다움만으로 내면의 아름다움은 무시하게 만든 것이고 오늘날도 얼굴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얼굴만이 소통의 통로는 아니다. 얼굴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얼굴은 결코 내면을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얼굴만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결국 그는 가면을 만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사용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똑같은 가면을 쓰고 문제가 일어나자 당국이 개입해서 가면금지를 내린다는 다소 엉뚱하게 보이는 이런 발상은 패전 후 일본에게 강요당한 다른 얼굴,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가면을 억지로 쓰게 만들고 화상 입은 주인공은 일본 그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여겨지게 만든다. SF적 공상이 현실에 대한 비판 내지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결국 아내마저 가면으로 속이고 시험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가면이 자신인지, 가면을 벗은 얼굴의 모습이 자신인지조차도 인식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상처만 깊어진다는 것과 자신 스스로 그것에 당당했다면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도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왜곡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당시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잘못과 패전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못하고 원폭에 대한 책임만을 물으려 한 것에 대한 시선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국수주의적인 생각에서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미국의 부당함에 대한 울분의 토로로써 무장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던지.

일본 작품들을 보면 이런 것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이 있어 그것을 잘 감추고 남이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끔, 아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포장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작품에서 그런 점은 내가 작품을 잘 읽고 있는 건지, 혹 그들에게 당한 역사가 있어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건지를 따지게 만든다. 한마디로 교묘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종된 것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보면 얼굴의 실종은 인간의 자아의 실종이 아닌 자신감의 실종이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얼굴로 사는 것은 개성의 실종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일본이라는 국가의 얼굴의 실종을 들 수 있다. 패전으로 망가진 나라, 전 국민의 패배감,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둔갑할 수는 없다. 일본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인간과 국가라는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만큼 마지막까지 내게 너무 어렵고 벅찬 작품이었다. 소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얼굴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고 '나'와 '남'의 다름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발전시키는 것이다. 거울을 보게 된 인간은,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얼굴의, 다른 문화의 인간을 많이 만나게 된 인간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아주 미묘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얼굴은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 소통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타인에게 명확하고 우호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다른 이의 얼굴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방식과 타협하는 것이다. 아니면 개인 간의 소통도, 국가 간의 소통도 모두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타인의 얼굴이라는 제목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가 아니면 '나'조차도 모두 타인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타인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것은 가면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자신만의 자아, 자신을 충족시킬 타인의 시선만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 된다면 무력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남의 얼굴을 통해 상처 입는 것이 자신의 얼굴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한 타인의 얼굴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 점점 더 소통 불가능, 소통 불통, 일방적인 언어와 행동이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문제점이 더욱 부각된다. 그러면서 작품 속 똑같은 가면을 쓴 것처럼 여겨지는 주변의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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