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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 VS. 베르메르
우광훈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베르메르 전시회를 기획하던 중 네덜란드에서 베르메르의 미공개작을 보게 된 한국인이 그 그림이 진품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최초로 공개한다면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위작의 가능성도 있다. 그 그림을 가지고 있던 이가 베르메르 위작으로 유명해진 가브리엘 이벤스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 그림을 가지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은 시작된다.
이제 작품은 가브리엘 이벤스의 행적을 따라가게 된다. 그가 화가가 되기 위해 입학한 미술 학교에서 진부한 작품,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이로 매도당하고 그 시대의 유행, 대중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교수들뿐 아니라 평론가들에게까지 외면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복수의 한 형태로 위작에 가담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가 나치에게 베르메르의 그림을 판 매국노로 붙잡혀 법정에서 논란에 휩싸이는 마지막 대단원까지 독자가 눈 돌릴 틈을 주지 않고 한 사람의 일생에 매달리게 만든다.
나는 현실이 가브리엘을 위작의 길로 몰고 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 수많은 무영 화가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위작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작은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논리로도 대중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안타깝다는 마음과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 가브리엘의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극명한 두 문장이 있다.
274쪽에서 처음 베르메르의 작품을 위작할 때 그의 마음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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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브리엘은 그대로 재현할 생각이 아니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자신만의 기법과 표현을 그림 속 어딘가에 은밀히 집어넣고 싶었다. 베르메르가 생전 즐겨 사용하던 회화의 기법은 그대로 노출하되,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나 기호 같은 것을 어느 한곳에 배치해 둘 생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베르메르의 탄생과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고,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서 벌일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게임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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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방 282쪽에서는 그 마음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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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
그렇다. 이제 베르메르의 그림을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시선 속에는 예전에 찾아볼 수 있었던 거장에 대한 호기심이나 존경심 같은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비평가들을 어떻게 속여 넘기고 얼마의 가격에 팔려 나갈까 하는 속된 계산뿐이었다. 이제 가브리엘은 자본의 논리에 힘없이 갇혀 버린 초라한 환쟁이에 불과했다. 늘 푸르게 빛나던 지고한 이상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껍데기만 남은 매미처럼 허상을 향해 울어 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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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비단 그림에 한정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소설가는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하면서 창작을 하는 모든 이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순수문학의 실종에 대한 애도하는 마음은 가브리엘이 시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화풍만을 고집하는 것이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온 것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뒤 사람들이 당대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는 것에서 대중의 변덕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전시회를 밀어붙이듯이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여 나아가야 한다고 웅변하는 듯이 보여 진다. 그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대중없이 그 어떤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대중은 곧 돈이다. 인간은 돈 없이 살 수 없다. 그 옛날 화가들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모두 자신의 후원자가 좋아하는 것을 그렸고 대중에게 박수 받을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비슷한 재능의 사람이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담당하는 부분이고 창작하는 이는 베르메르가 되든지 가브리엘 이벤스가 되든지를 선택해야 한다. 전자는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다 간 화가지만 후대에 인정받은 이고 후자는 돈을 위해 영혼을 판 이다.
베르메르를 이렇게 그의 위작을 만든 가브리엘 이벤스를 통해 조명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독특한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이렇게 세세하게 그의 행적을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랍고 기쁘다. 마치 사토 겐이치의 <카르티에 라탱>을 봤을 때 일본 작가가 남의 나라 역사도 자신들 손으로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것이 참 부러웠는데 이제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미술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선구자가 있으면 추종자도 있고 그래서 한 유파를 형성하고 다시 새로운 것에 밀려나가며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 시대상을 반영하듯 모든 창작은 어떤 형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무엇을 담아내서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그 생각과 판단, 흐름을 공유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평론과 대중의 유연함이 공유할 수 있는 많은 인재를 보유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지막까지 우리가 과연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 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