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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종신 검시관>이 구라이시라는 인물을 조명한 작품이라면 이 단편집은 기본적으로는 D현경의 인사 담당관으로 현경 최연소 경시인 후타와타리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여기저기 모든 단편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고 이름만 언급되기도 하는 현경의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늘의 계절>은 그 후타와타리가 처음 등장해서 애를 먹는 작품이다. 퇴직하는 고위층의 낙하산 인사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는 인사부에 말 그대로 그늘의 계절이라 할 수 있는 인사철이 와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낙하산 임기가 끝난 분께서 물러나기를 거절한다. 날고 기는 엘리트 후타와타리라고 해도 형사로써 카리스마 넘치는 오사카베에게는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그의 속마음이라도 알고 싶지만 탈 없이 끝날 거라는 말만 듣는다.
어느 조직이건 이런 낙하산 인사도 자기 식구 감싸기와 자신들의 파워를 알리는 것인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니까 입맛은 쓰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이 단편만으로도 경찰 조직 안에서도 사람이 나름대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모양새건 간에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닌 조직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는 점, 그 안에 들어가면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의 소리>는 경찰 감찰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매일 오후 세시 우편물이 온다. 그 중 투서도 있고 고발도 있다. 이것을 파악해서 상벌로 가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신도는 자신도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음 인사에서는 병 때문에 이곳에 발령받았지만 다른 곳으로 가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17년째 경시가 되지 못하고 고발의 주인공이 된 인물을 동정한다. 하지만 내용의 사실 확인은 중요하기에 그의 예전 부하 직원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승진을 그들은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 얼마나 그들이 승진에 목을 매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에서는 후배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선배들은 자진 사퇴를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그런 곳도 있으니 승진을 못하고 후배에게 번번이 밀려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 전에 읽은 <은행원 니시지키씨의 행방>에서 지점장까지는 하고 물러나야지 하던 그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검은 선>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여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직까지 경직된 경찰 사회에서 여자들이 설 자리가 얼마나 좁은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뭐, 어디는 여자들이 일하기 편하랴 싶지만 특히 여자와 함께 일하는 것을 남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찰의 일을 남자들의 일이라고 규정지은 그들의 사고를 깨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도 된다.
<가방>은 경찰 경무부 비서과라는 조금은 생경한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읽다보면 익숙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의원들의 질의에 응답을 잘할 수 있도록 발로 뛰고 인맥을 쌓는 곳인 것이다. 이곳에서 자칭 엘리트가 있다. 쓰게는 그래서 한 의원의 폭탄 질문을 알아내려 전전긍긍하면서도 신도가 후타와타리에게 물어보라는 것을 흘려버린다. 후타와타리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조직이라는 곳은 물고 물리는 곳이다. 약점을 잡히지 말고 남의 약점을 잡아야 하는 곳이다. 아마도 이것은 비단 여기 경찰 내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요코야마 히데오는 특유의 미스터리와 휴머니즘을 바탕에 두고 쓰고 있다. ‘세상사는 미스터리요, 호러다.’라는 작가의 말이 앞에 쓰여 있다. 그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단편들이다. 하나하나 읽으면 경찰이라는 조직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삶이 느껴지고 그들도 그저 조직의 일원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경찰이 등장하지만 경찰 소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산다는 것이 무서워진다. 몰랐을 때나 자신만만하고 세상이 코딱지 만해 보였지, 사람은 커지고 경험도 쌓이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아지는데 왜 세상은 더욱 거대하게만 보이고 자꾸만 나는 움츠려 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사회가 계속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읽어보면 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찰 내부에서 발견하는 ‘나’는 조금 색다른 경험일 것 같다. 경찰 내부의 일상의 미스터리라고나 할까, 그런 작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