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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바다 건너기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벌집에 키스하기>는 미스터리 형식의 작품이었다. 오랜 세월 크레인스뷰를 떠나 있다가 마을을 찾은 중년 남자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 프래니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떠나 있다 돌아와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은 고향을 보는 사람의 시선과 그 안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의 시선은 다르다. 두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는다면 장르를 떠나 그런 점도 느끼게 된다.
갑자기 등장한 다리가 세 개에 눈이 하나뿐인 이상한 개. 그 개가 죽자 묻어 주려고 땅을 파니 나타난 이상한 깃털, 그리고 다시 땅 속에서 자신의 차 트렁크에 옮겨진 죽은 개. 늘 싸우던 친구 부부의 실종과 학교에서 시체로 발견된 아이와 의붓딸이 문신한 모양이 그 깃털이라는 것에서 오는 충격. 그리고 마구 엉키는 세계. 프래니는 그것에 적응할 새도 없이 이리 저리 떠밀린다.
SF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존재하는 나와 같은 나는 무수히 많다. 그것이 바로 다원우주와 동시존재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다지 SF적이지 않은 까닭에 나와 내가 만나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앞에 젊은 날의 나, 어린 날의 나, 그리고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 또한 나이가 든 나를 경험한다면?
어떻게 프래니처럼 대처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비로소 프래니의 매력을 알게 된다. 말썽꾸러기에 입이 걸었고 깡패 같은 경찰 서장의 이미지가 <벌집에 키스하기>에서 보여 지는데 여기서는 그런 그가 좀 더 세세하게 드러나 그것이 지극히 인간적으로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죽어도 싫은 핑크로 온 집을 도배한 프래니, 의붓딸을 사랑해서 절대 평범하게 살지 말라고 이야기해주는 자상한 프래니, 친구의 기이한 점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머리가 약간 모자란 친구를 위해 총을 들고 나서는 정의로운 프래니. 그러면서도 그는 두려워한다. “이 모든 걸 어느 날 갑자기 잃었는데, 그동안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까봐 겁이 나...”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 아이는 내게 뭐라고 말을 할까? 아마 쯧쯧쯧 하며 혀를 차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40년 동안의 모든 내가 있어 오늘의 내가 존재함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잊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바라던 모든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꿈 하나하나와 약속 하나하나와 기억 하나하나를 모두 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잊고 있던 내게 이 작품은 그런 모든 것을 소중히 기억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프래니는 그들 모두가 바로 완전한 ‘나’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나무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의지하라고.
8살의 건방진 ‘나’를 만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16살의 삶에 회의적인 ‘나’를 만나더라도 이해하고 너그러이 웃어줄 수 있기를, 그들 또한 지금의 ‘나’를 있는 이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기를 프래니가 그랬듯이 바라고 기원한다. 나도 프래니처럼 될 수 있기를...
조금은 황당하고, 조금은 어이없게 끝나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 프래니가 있어 좋았다. 따뜻한 프래니를 만나 행복했다. 내가 잊고 있던 그 많던 ‘나’를 프래니가 찾아줬다. 고맙다. 한편의 동화처럼, 어른들을 위한 우화처럼, 누군가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지만 막상 기댈 수 없는, 이제는 누군가에게 울타리가 되어 줘야 하는 힘든 어른들에게 작은 용기와 힘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무다리를 건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지금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웃음의 나라>보다 <벌집에 키스하기>보다 더 근사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