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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책을 펼치자마자 확 끌어당긴다. 그리고 끈적끈적하게 이 여름의 더위처럼 달라붙는다. 도대체 누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니 당신 누군데 그리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겁니까? 묻고 싶어지는 도입부를 지나면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은 한 지방의 유지인 의사집안의 3대가 한날 생일인 잔칫날 누군가 독이 든 음료수와 술을 놓고 가서 그것을 마신 사람들이 그 집안사람은 한 사람을 빼고 모두, 그리고 마을 사람까지 독살했다는 것이다. 살아난 사람은 그 집의 앞이 안 보이는 외동딸과 집안일을 거드는 아줌마, 신고한 사람은 늦게 도착한 이웃집 아이, 그 아이 중 한 명이 자라서 이 사건을 책으로 펴낸다.
이야기는 화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려주기도 하고 끝에 가서야 화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마치 그 범인이 공소시효를 알 듯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여름을 부여잡고 계속 이글거린다.
독특하다. 한마디로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정신없이 빠져서 작가가 휘두르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뜨뜻해지는 것이 마치 한 여름 땡볕에 오래 앉아 있어 올라오는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꿈이 찾아드는 길이라는 제목의 배가 붙은 수면에 비친 모양의 종이학이 이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마주 보는 것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보여 지는 사람과 보는 사람, 감추는 사람과 내보이는 사람, 중심인과 주변인, 그리고 나와 너... 그렇게 그 여름 사람들은 제각각, 아니 늘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이미 정해진 것들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자기 안의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눌러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보는 시각을 다르게 만든, 왜곡시킨 것이라는 것을.
그 여름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담긴 시한폭탄이 발화점에 도달아, 아니 발화물질을 만나 동시에 터져버린 것이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범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 이야기, 느낌 등등 그런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같은 곳에서 같은 사건을 접한 사람들이 저마다 들려주는 제각각의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바람처럼 불어온다. 그래도 그 여름의 뜨거웠던 잔상, 폭발의 여운은 남아 평생 그들 안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받지 못해도 좋았을 세상의 한 여름은 그들에게, 누군가들에게 참으로 잔혹해서 망각의 늪에 빠지지 못하도록 세상사람 모두가 다 잊어버린 축제라 해도 그렇게 뇌리에 남아 맴돌게 만들었다. 유지니아, 유지니아... 그 파란 방과 하얀 백일홍이 마지막까지...
아쉬운 것은 몇 가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을 독자가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차피 사건이란 것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명확하게 수학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저 이것 또한 작가의 의도적 미스터리라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다 읽은 뒤 어떻게 써야 좋을지 참으로 난감했다. 진실이 무엇이냐고? 진실은 각자의 마음 속에 서로 다르게 남고 말았다. 진짜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무엇에 대한 진실을 우린 원한 것일까? 책을 덮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난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그저 그 여름이 지금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처럼 무더워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자각한 것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