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 쿠바, 거장과 남은 이야기들 ; Soy Cuba, O Mamute Siberiano >>2004. Brasil.90min
 D : Vicente Ferraz
W : Vicente Ferraz
M : Jenny Padron
<<소이 쿠바>>에서 학생들의 장례를 치르는 골목의 씨퀀스가 등장하는 명장면으로부터 이 다큐도 시작된다, 영화의 바로 그 장면이 있었던 현재의 장소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주연 배우였는데, 그는 이 장면에 자신이 있었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해서 감독은 물론 우리에게 까지 충격을 줬다. 그 정도로 <<소이 쿠바>>란 영화는 그들에게 30년 동안 잊혀진 기억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평가 되었다는 사실도 남의 얘기였던 것이다.
1960년대 쿠바혁명기의 아바나 입성 후 쿠바예술진흥원이 세워지고, <<혁명 이야기>>를 촬영하도록 전폭지지 했던 체의 서한도 등장한다. 그리고 소련과 합작으로 혁명을 기념하고 인간과 사회, 감성을 위한 영화촬영 계획 끝에 마하일 칼라토조프 감독과 200명의 스탭들이 <<소이 쿠바>>를 찍게 됐던 이력과 작업 과정을 당시 출연했던 배우들과 스텝들에게서 생생히 듣는 시간이 되었다. 또한 <<소이 쿠바>>가 개봉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철수하고 30년간 잊혀질 수 없었는지의 이유도 짚어 주었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던 칼라토조프였기에 그가 5천명의 군인이 필요하다고 하면 카스트로는 5000명의 군인들을 지원해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스텝들과 배우, 쿠바 시민들도 이 영화와 감독, 조감독, 촬영감독에 대한 애정과 흥분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된 후 쿠바에서도, 소련에서도 최악의 평과 흥행 실패를 맛본다. 그 이유는 쿠바와 소련은 정서가 틀린데, 쿠바인들은 차라리 부라질의 시네마노보 계열이 더 쿠바에 적합했다고 회상한다. 너무 느릴 뿐 아니라 정열적인 쿠바 대중의 기호도 살리지 못했기에 이 영화 제목이 '나는 쿠바가 아니다'라고도 회자되었다.
소련에서도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그려진 데다가 미국식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어 대중에게 보여주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후 소련은 붕괴되고 미국의 대치 진영이었던 소련의 지원 떠나가자, 쿠바 경제는 격감, 침체의 일로를 걷는다. 혁명의 이상향은 칼라토조프의 영화에서나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30년 후 마틴 스콜세지와 프란시스 코플라의 눈에 이 영화가 발견되었다. 덕분에 현재에도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위, 아래, 옆으로 유려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정확하게 계산된 배우의 동선이 있는 롱 테이크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쿠바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몰랐기에 늦은 재발견이 이렇게 안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그들의 인생에 끝자락에서 발견하게 된 것처럼.
다큐 관계자들이 <<소이 쿠바>> 비디오 테잎을 선물하면서 걸작이란 당대의 평가를 들려주자 그들은 무척 놀라워한다. 이에 대해 그들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변증법이라고 결론 내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비판하다가도 공산주의가 해체된 후 비평가 1명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혁식적 미학을 호평하기 시작하면 다시 비슷한 호평이 붐이 된다고. <<소이 쿠바>>에서 우리는  볼셰비키의 환영과 혁명의 이미지, 그리고 쿠바를 본다.
비록 쿠바에서는 실패했지만 그 영화를 본 감독 및 영화제작자들에게 <<소이 쿠바>>의 영상은 각인되었다는 사실에 영화의 저력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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