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조차 생소한 인도 감독의 작품을 집어 들게 된 것은 <<오르>> 예매에 실패한 후 다른 영화 관람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냥 찍었기 때문이다.제목만 보고.
아침 10시, 제일 작은 상영장에서 단촐하니 모인 관객들을 보니 사정은 대략 비슷한 듯 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보는 내내 위장이 들썩거리는 듯한 고통으로 앉은 자리가 불편해지긴 했지만. 미하엘 하네케 만큼이나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곤란한 취미를 가졌다, 이 감독은.
드룸. 그는 이 영화의 화자인 동시에 주인공이다. 어머니는 세살 때 바다에서 익사, 아버지는 정부의 토지 점유에 저항하다가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사망한다. 평소 아버지의 정치관과 종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드룸은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지자 필연적으로 도시로 나와버린다. 도시에서의 그는 피가 낭자한 폭력의 현장 사진을 전문으로 담는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소 도살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직업과 개인적인 비극의 이력들의 영향으로 여자를 난도질하는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자, 곧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 후 드룸은 자신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오던 아버지 친구와 벙어리 사촌이 정부측 관리에게 잡혀가자 우연히 만난 변호사 엔젤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러나 엔젤은 드룸의 책과 사진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신앙의 힘을 조롱한다고, 그에게 구원의 방법은 종교에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드룸은 그저 엔젤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드룸이 최근 담아오던 아녀자 연쇄살인 사건이 차이나촌에서 발생하게 되고, 거기서 그는 난도질당해 죽은 자신의 연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그가 한 일은 사진을 찍는 일. 그 사진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폭력적이다.
한편 드룸의 책으로 그의 가치관이 궁금해진 연구생 에어가 논문을 쓰고자 하는 목적으로 드룸의 곁을 기웃거리게 된다. 엔젤이 죽은 후 혼자 남은 벙어리 사촌과 집에 돌아와 있던 드룸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좀 먹었던 비극적인 역사로 되돌아가 있다. 그런 드룸을 찾아와 그가 찍은 사진들과 사진에서 나타난 인격만으로 현대 사회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폭력 산업의 활성화를 도우며 그 밑에 기생하는 벌레 취급을 하게 된다. 주위의 위협 속에서도 나름대로 적응해왔던 드룸은 자신의 삶이 부정당할 입장이 되고, 폭력을 고발하는 자신의 역할이 폭력을 산업화시킨 주범인양 취급당하자 자신에게 내재해있던 폭력을 불러내 에어에게 앙갚음하는 것으로 화를 돌린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보고 와서 드는 감상이 줄거리의 나열일 뿐이라니. 이 정도도 나 스스로 흐뭇할 정도로 영화에서는 모호한 연출 투성이였다. 영화에서 'Be the Reds'티셔츠나 우리나라에선 이두 아이콘 총서로 나왔던 '무엇이 세계를 바꾸는가' 시리즈들이 등장해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지만, 영화는 철저히 혼잣말처럼 일방적인 얘기를 할 뿐이었다.
주인공 드롬에 있어서 바다는 아버지고, 어미니였지만, 치유랍시고 반복적으로 나열할 뿐이어서 그런 억지가 지겨워질 정도였는데, 그 순간 순간을 폭력적인 이미지들로 메꿔 관객의 사고를 일시정지 시켜 버린다.
관객을 의식을 혼돈시켜 놓고 감독이 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따로 있었다. 신체의 모든 부분에 대해 보험을 파는 시장통의 상인, 선정적이고 가장 잔인한 사진을 파는 언론인들, 평범한 현대인의 일상속에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폭력의 모습들, 착하기만 하던 벙어리가 도끼로 부숴버린 타인의 머리,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어디로부터 배워 왔을까?
영화에서 내도록 보여준 그 선혈 범벅인 사진들, 충격적인 교통사고 장면에 도살장에서 신음을 흘리던 소, 흐르는 피, 찢어지는 고깃덩어리들이 영화속에 구겨져 있는 형태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대로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공격한다. 오죽하면 빈 속에 마신 블랙커피가 걱정되었을까.
최근 만들어지는 뉴스를 포함한 모든 문화적 상품들을 보면 찰나의 시선을 잡기 위해 더 선정적이고, 더 폭력적이고, 더 참혹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 홍수 속에 우리는 변별력 하나 없이 무뎌지고만 있는 것이다. 이 세계 한 모퉁이, 아니 바로 우리의 곁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다.
이 시대의 공포가 부른 폭력 때문에 참수당하거나 유린 당한 주검들이 안전한 자신의 방에서 모니터로, 다시 안전한 우리들의 방으로 유린당한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