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째 나라 높새바람 30
김혜진 글.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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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라, 완전한 세계 이야기는 아진의 이야기로 끝이 났던 게 아니었던 건가-

  처음 발간 소식을 접하고 당황했었다. 꽤나 완성도 있던 '아무도 모르는 색깔'을 떠올리자 전작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우려에서였다. 받아들었을 때에는 '역시나'라는 생각이었다. 아로 3남매의 이야기에서 확장된 다음 이야기가 아니라, 외전격인, 그네들이 완전한 세계에 가기 전의 이야기란다.

  전작들에서 읽었듯이 '완전한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가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세계이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완전함'도 사실은 '불완전함'이었는데 그처럼 안정되기 전의 완전한 세계는 얼마나 '불완전' 했겠는가.

  책 뒷 표지에 있는 책 소개 문구가 말해준다. '완전한 세계가 그리 완전하지 않았던 아주 오래전 이야기' 라고.

 

  새 책을 받은 기념으로 앞의 책들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이삿짐을 쌓아놓은 현재, 어디쯤에 책들이 들어가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와중에 사전 서평단 모집 메일이 날아왔다고 덥썩 응해버린 나도 참 나 답다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이런 때에 꼭 이래야 하나 싶었는데- 안 했으면 책 볼 때마다 두고두고 생각났겠지. 어차피 읽을 거였고, 어차피 쓸 리뷰, 이왕이면 작가님의 귀여운 사인과 함께 받아보는 일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다.

 

  애정을 가지고 읽는 책에게 객관적이 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아로와 완전한 세계'를 읽고 환호했으나 '지팡이 경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다시 만난 '아무도 모르는 색깔'에 무릎을 쳤던 걸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나는 완전한 세계 시리즈를 퐁당퐁당 건너뛰며 감동 받는 유형의 독자인 모양이다.

  읽기 힘들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읽으면 아마 내가 왜 그랬을까,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아쉬운 부분들과 좋은 부분들의 밸런스 문제인듯 하다. 좋은 장면이나 구절이 와닿는 정도가 크면 다소 아쉬웠던 장면들을 홀랑 잊어버리는데, 감동이나 공감의 정도가 약하면 아쉬운 부분을 자꾸 곱씹게 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렇게 사족이 길어지고 있다.

 

  자신의 나라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 참. 각 나라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는 세계에서 다른 나라에서 자란다는 것은 곧 정체성과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꿈의 사막'에서 참은 자랐고 그랬기에,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완전한 세계의 그 누구보다 열려 있을 수 있었다. 마치,  불완전한 세계의 인간들처럼.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잃고 최초존재를 잃고 있던 공중도시를 구할 수 있었고, 아무도 모르던 불의 나라를 완전한 세계 안으로 끌고 나올 수 있었으며, 잘못되어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 이름이 '참'인 것처럼.

  세계의 발견은 '일탈'에서 온다.

  공중도시의 아이지만 꿈의 사막에서 자랐기에 날지 못하는 '참'과 꿈잣는 이면서 스스로 타인의 꿈을 이뤄주겠다며 꿈의 사막을 나온 '명'의 소망과 의지가 있었기에 두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가장 높은 공중도시와 가장 깊은 꿈의 사막, 가장 낮은 불의 나라까지, '참'의 행적으로 완전한 세계가 연결되었다.

  다만 '참'과 '명' 두 아이의 여행이 다른 이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좀 불편하다. 심지어 알라딘에 있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읽다보면 '숭고한 동기'라고 쓰여있다. 진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다른 사람의 희망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일의 부당함 같은 것들은 자신의 욕구와 소망에 충실한 어린이들이 한번쯤 꼭 생각해봐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란다. 나는 동화에 '희생'에 대해 강요하듯 쓰여있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다. 남을 위해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나쁜 편'에 서있게 만들어 버리는 구조 때문이다. 자신의 소망에 충실한 것에 죄책감을 갖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에 충실한 올바른 방식을 제시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욕구나 소망에 충실한 모든 사람이 악인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처럼 '꿈'을 강요받는 시대가 있었을까.

  '꿈 꾸는 일' 그러니까 '소망하는 일'이 이렇듯 '당연한 일'이 되었던 시대가 있었을까.

  하지만 누구나 꿈의 사막 어딘가에 '소망상자'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에 의지를 갖고 꿈 밖으로 가지고 나와 '희망'하기가 고단하고 힘겨울 따름이다. '소망'이 '희망'이 되기란 의지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소망을 짓누르다간 '부폐'하고 만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 '꿈'이란, '소망'이란 얼마나 어렵고, 쉽게 버려지는 단어일까.

 

  완전한 세계에 대해 작가는 아직도 알려주고 싶은게 많은 모양이다. 자꾸 설명하고 싶어한다. 물론, 시리즈 중간부터 읽어도 괜찮기 위해서는 필요한 장치겠지만, 좀 더 자연스러운 서술방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말미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완전한 세계 시리즈는 다음 권으로 끝이 날 듯하다. 시리즈는 끝날테지만 그래도 '끝없는 이야기'마냥 세계는 여전히 이어져 있을 것이다. 참의 소망과 희망이 현재 진행형이듯, 여정을 함께한 독자들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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