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색깔 높새바람 19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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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제 완전한 세계의 색깔들을 볼 수 있지. 그 대신에 불완전한 세계에서의 너의 색깔들을 잃어버렸어. 네가 보고 네 안에 담았던 색깔들을 말이다. 색깔을 잃은 기억들은 살아 숨쉬지 못하지. 색깔과 함께 기억도 잃는 거야. 그 색깔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너는 네가 아니게 된단다.-158쪽

그렇게 질문이 많다는 것은 아직 네 안에 불완전함이 남아있다는 증거일 테니까.-234쪽

타오르는 색은 얼음을 녹이고 가라앉는 색은 물을 가르고 흐르는 색은 바람을 잡는다.-252쪽

"아무도 화나게 만들지 않으려면 아무 일도 안 하면 된다."
"그럴 순 없어요."
"그렇다면 누군가는 네가 하는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라."-341쪽

붓에 묻은 물감이 다 칠해졌을 때, 거의 투명해진 엄마의 모습은 색바람처럼 하나의 색깔로 뭉쳤다. 그 색깔 한 줄기는 아진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뜨겁고도 차가운 느낌이 가슴에서 번졌다. 아진이 몸을 움츠린 순간, 아진이 색을 칠하던 종이가 쑥쑥 넓어지고 커지면서 색채의 뜰을 뒤덮었다. 잃었던 아진의 색깔들이 돌아와 그 위에서 춤추듯 움직였고 엄마가 남기고 간 색깔은 그 모든 색깔과 섞였다.

(...) 종이가 작다면 슬픔의 색깔이 종이를 채워 아진을 계속 울게 만들겠지만, 아진의 불완전함이 바탕이 된 그 종이는 한없이 넓어서 앞으로 칠해질 많은 색깔들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517-518쪽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색깔의 소식에 흰 옷을 입는 것은 이 색깔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야. 너무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버렸지. 흰색은 가장 낮은 곳의 색깔이야. 흘러 들어오는 색깔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꾸나."-521쪽

완전한 세계의 우리는 네가 닿은 그 싶이를, 넓이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막연하게 짐작만 한단다. 불완전해진다는 것은 끝없는 가능성을 얻는 일이겠지. 그 중에는 아주 슬프고 괴롭게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걸 넘어설 때 알게 될 기쁨과 희망의 가능성도 있겠지...-526쪽

"색채나라는 한 번은 불완전해졌어야 하는 거였소. 비틀어졌던 것들을 되잡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거지. 이것이 과연, 불완전한 세계와 우리의 관계로군."-5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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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색깔 높새바람 19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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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사연 많은 책이 손에 들어왔다. 무어, 사연이라고 해봐야 '나'와의 사연이지만 내게는 몇 없는 경험이라 이 책이 아주 오래도록 내게 특별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로 3부작 중에 이 책이 가장 좋다.(작가님이 동안이고 예쁘고 이 책에 사인해줘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가독성 또한 세 권 중 최고여서, 한 번에 다 읽진 못했지만, 다 읽은 시간을 합치면 세 시간 남짓 걸린 모양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지팡이 경주'에서 평론가가 걸고 넘어갔던 '선택자의 당위성'에 대해 더이상 누구도,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삼 남매의 맏이 '아진'이 7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 읽는이로서 완전한 세계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이, 아니, 인간이 판타지를 열망하는 이유와 같다. 현실은 고단하고, 슬프고, 괴롭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실을 이겨낼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바로 '판타지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다. 
  아진이 불완전한 세계의 슬픔을 받아들이기 위해 완전한 세계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오롯이 아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작가가 이야기했듯, 이번 이야기에서는 모든 일이 아진에게 비롯되어 아진으로 마무리된다. 한 개인의 세계는 그 개인이 속한 전체 만큼이나 불완전하여, 끝없이 변화하고, 받아들이고, 확장해나간다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진이 자신이 읽은 완전한 세계의 이야기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불완전한 존재여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단한 현실을 살아갈 힘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색은 나뉠 때가 아니라 섞일 때 온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항상 끊임없이 주변의 영향을 받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렇게 현실에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고단해지면, 저 완전한 세계로 가끔, 슥 발을 담갔다 빼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아로와 완전한 세계'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별꽃의 수호자의 이름과 이 이야기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아무도 모르는 색깔'의 이름(테히사와 아진을 아무리 합쳐봐도 당최 모르겠다.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작가만이 아닌 모양이다.). 열심히 생각하는 사이, 어쩌면, 나도 경험하고도 잊고있었는지 모를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가 꿈을 타고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알록달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열정이 부족한 나로서는 꽤나, 열심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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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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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ANNIE ON MY MIND'라는 것을 떠올리고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조금 난감하다. 역자는 역자의 말에서조차 '작가는 동성애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목은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자신의 성 정체성에 고민하기 시작한 두 소녀의 이야기인만큼, 주제는 분명 '동성애'이다. 하지만, 어쩐지 충분히 자극적인 제목을 지어놓고 독자를 유도하려는 것은 아닌지 조금 의문점이 들기도 한다.
  지난 해 읽었던 '엠 아이 블루?'에 낸시 가든의 단편이 실려있었고(역시 여고생 둘이 학교에서 열린 행사를 통해 가족과 일반인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곳에서 이 작가의 처녀작을 소개하기로는 분명 '내 마음속의 애니'라고 하였기에, 사람 이름 외우는 데 쥐약인 나로서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무어,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편집장 탓인지, 번역자 탓인지(심지어 등단을 했다고 하는데도!) 맞춤법도 엉망인데다가 문맥상 맞지 않는 단어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일까나-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원 작품이 나온 1982년 당시에는 이 작품이 금서가 될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이 책의 내용이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소년'에 초점이 맞춰빌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사회는 성적 소수자에 대해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터라 커밍아웃을 한 어른은 어린이 프로에 나올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 당시, 훌륭하지만 레즈비언인 여선생님은 사립학교 교단에 설 수 없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대학조차도 입학이 쉽지 않은 시대에 '감히' 동성애자 교사라니- 동성애자임이 밝혀져'버린' 리자가 입학허가가 난 MIT에 갈 수 없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은, 아마 성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많은 청소년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중 하나였을 것이다.('사립학교 아이들'에서 한국계 여학생 '신준'처럼 동성애자임이 밝혀지고(뭐 반드시 그것때문은 아니었더라도 어찌되었든) 자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겠지.) 

  청소년들의 성정체성 고민에 대해 촘촘히 그려내고 있는데, 다소 아쉬웠던 것은, 커밍아웃(여기에서는 아웃팅이겠지만-) 이후의 이야기가 너무 빠르게 전개된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리자 본인이 얼떨떨한 상황에서 어른들끼리 알아서 처리해버렸을 테지만, 학교와 부모님께 알려진 '리자'의 고민만이 부각되고(물론 화자는 리자이니 당연하겠지만-) 커밍아웃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법한 '애니'의 고민은 묻혀버렸다.
  '리자'가 '애니'에게 편지를 하지 않은 6개월은 '리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리하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애니'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뭐, 아쉬운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고- 우리나라에서 점차적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소수자 이야기가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환영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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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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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문학론' 시간에 사용한 텍스트 뭉텅이 속에 있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이 작품을 다른 시간도 아닌 '아동문학론'에서 다뤘다고 말하면 누구나 놀라곤 했다. 그럴 수밖에. 아이들에게 읽히기엔 마르셀 에메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제법 묵직하다.

  표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외에 다섯 편의 단편을 묶어 내 놓은 이 책은- 200쪽이라는 분량만큼 가독성도 꽤나 좋은 책인데, 가볍게 읽고 던져버리기엔 남는 것들이 꽤나 무겁다. 
  작가 소개를 보자.
  '익살스럽고 특이한 인물 창조, 간략하면서도 신랄한 이야기 구성, 위트와 아이러니와 역설의 효과적인 배합, 독창적인 패러디로 특유의 익살을 펼치는 유쾌한 작가 마르셀 에메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해냈다.'

  작품 안에서 인물- 어느 날 갑자기 몸이 투명해지더니 벽을 통과할 수 있게 되어버린 뒤티유욀(「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존재처럼 보이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는 쥘 플레그몽(「생존 시간 카드」), 가족을 위한 자기의 헌신을 가족에게 지나치게 강조하고 욱하는 성미때문에 불편한 가족관계를 만들어 놓지만 사실은 마음이 약하기 그지없는 자코탱(「속담」), 박제된 새와 늘상 흥분하며 대화를 하는 가게 주인(「칠십 리 장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평생을 모은 돈을 의식적으로 나눠주는 일로 선행을 쌓으려는 집달리 말리코른(「천국에 간 집달리」)-들이 놓인 상황은 처연하지만 익살스럽고, 분노를 일으키면서 통쾌하게 끝을 내기도 한다. 
  뒤티유욀이 벽을 지날 수 있는 힘을 사용하는 건,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를 골려주기 위함이었고, 어린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코탱이 대신 해준 숙제 때문에 아들은 형편 없는 점수를 받아오며, 글쟁이에게 15일이란 생존 카드를 발급해준 그 세계는 점점 뒤틀려 6월이 45일까지 있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작품집이 처음부터 하나로 묶여 나온 게 아니라 여기저기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데 묶어 내놓은 것이니,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에 집중되어 있다. 하여,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서 보여주는 냉소적 유머와 '칠십 리 장화'에서 보여주는 인간애 사이의 갭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쉽지 않다. 특유의 냉소적 유머가 마음에 들었던 터라 '칠십 리 장화'나 '천국에 간 집달리'는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읽는 것만으로도 꽤나 유쾌한 작품들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분량이 짧기에 촘촘하게 읽어내려야 하고, 내용에 담긴 풍자와 냉소는 시간 죽이기로 읽기에는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라도 읽는 내내 비싯하니 웃음을 입꼬리에 물고 있던만큼 누구나 유쾌하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선종훈씨의 음울하고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삽화는 작품의 분위기와 썩 잘 어울렸으며 역자후기에서 설명해준 작가의 성명학 의도는 불어를 모르는 독자에게 꽤나 친절하여서 읽고 나서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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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즈 지음, 용경식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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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바보가 되고 싶은 걸까.
  오해하지 말자. 이 책에서 말하는 '바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사회에 적당히 편입해서, 적당히 튀지 않는, 적당히 성공한 속물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러니까 비판의식을 적절히 거세하여 삶에 대해 진지하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원체 '살아있는 것' 자체에 관심이 적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지금도 앞으로 10년 동안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은 사실 부끄럽게도, 진지하지 않다.(솔직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 더 강하다-)

  엊그제였나, 동기가 쓴 '지식인'에 관한 글을 읽은터라- 지금 드는 생각은 조금 복잡, 미묘하다.
  앙투안이 방황할 수밖에 없던 것은- 아마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독립적이어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얕은 관심으로 얻은 지식이기에, 대타로 강의를 할 수는 있어도 그 과목 담당 교수가 될 수 없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재주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말, 아마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하나의 사회나 조직으로 편입해들어갈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지식의 덩어리- 그렇기 때문에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될 수도 없고 '영향력있는 지식인'이 될 수도 없다. 행동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지식인은 사회와 괴리되어 있고, 어디에도 편입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가족이라 하더라도.(앙투안이 과연 그네들을 비판 없는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비판과 애정 사이에서 더 괴로워하지 않을까-)
  앙투안은 행동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고, 목소리를 내기에는 그의 지식의 관심사가 편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정치적 신념'이 아닌 '양심' 즉 '도덕적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21세기에, 정치적이지 않은 지식인이 '조직'과 '사회'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시 묻자.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반쯤은 발을 걸친채로 눈치를 슬슬 보고 있다. 앙투안보다는 덜 과격하게나마 '사회인'이 되려고 버둥대고 있다. 그럼, 나는 정말 바보가 되고 싶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 사회 생활이 지속적이지 않다.

  나의 삶과 닮아 있는 앙투안의 삶을 들여다보면서(물론 나는 그보다 덜 지성적이고 더 속물적이다.), 그가 사회로 기어들어가 영위했던 삶이, 자신이 바보가 되기를 선언하며 봉인해버린,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던, 플로베르 전집에 산산조각날만큼,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좌절해버렸다. 

  엑소시즘을 지나 앙투안이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의지하며 지내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과 역시 자신과 닮은 길에서 만난 클레망스와 유령놀이를 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 과정이 조금 급작스러웠으나-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투안이 행복해지려면,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곰팡이가 슬지 않으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물 일곱,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될지 모른다는 것에 조금,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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