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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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 시인은 한동안 쓰지 못한 시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고통의 잔치가 끝나 시인이 써놓은 시는 살아남은 고통의 기억들이고 하늘의 별 혹은 지상의 똥과 같은 슬픔이다('돌아와 나는 詩를 쓰고'). 글을 쓰려면 고통을 눈앞에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해야 한다는 한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그처럼 시인은 그 고통의 기억들을 한데 모아 두었다. 그 집은 불안한 바람에 삐걱이고 슬픔의 세간들로 가득 찬 곳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갈라지는 벽을 보며 벽이 꾸는 꿈을 함께 보고 있다. 죽을 듯이 아프지만 그 고통 속에서 시인은 소망, 희망을 꺼내놓고 있다(<기억의 집>).

하지만 그 희망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2부에서 시인은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슬픔의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 슬픔을 먹는대로 토해버린다('토악질'). 이런 무의미한 토악질을 반복하는 시인에게 아직 희망은 '허락'되지 않았다. 악몽을 딛고 빛으로 빛나기를 바라지만 유혹에 굴복되어 죽은피를 빨고, 빨린다. 희망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죽어가는 것은 우리의 삶과 죽음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이 늘 죽음과 삶의 열망을 함께 두기 때문이다. 시인은 '희망이 있다면'이 아니라 '희망이 不可하다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희망은 '가짜'인 것이다. 희망이 옳지 않다면 시인은 희망을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울지 않고 다 버리고 맨발로 가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끝을 위한 시작이라고 말한다('희망의 감옥').

이 시작을 시작으로 시인은 3부에서 모든 것을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서 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시인에게 있어서의 삶의 의미 때문이었다. 허약한 삶이 기대고 있는 허약한 난간에서 시인이 본 것은 얄팍한 삶의 깊이였다. 하지만 시인은 그 경계에서 필사적으로 고통의 춤을 춘다. 슬픔의 리듬에 맞추어서 벌이는 춤사위로 시인은 희망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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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지성 시인선 191
이정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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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이 진 자리/그곳이 밤송이의 배꼽이다/그리고 그 배꼽이, 그 사거리가/밤톨에겐 문이다

「자서(自序)」로 써놓은 첫머리에서 시인은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밤송이의 배꼽이란 생식기를 의미하며 그 자리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행위가 동적으로 순환되는 것이다. 그 배꼽에서 밤색 털이 솟아 쥐밤나무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시는 그 문을 들락거리는 성기(性器)라고 이야기한다. 그 행위 끝에 '발기의 끝자리에 밤꽃 향기 무성하리라'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내 시는 쥐좆이지만 앞으로 밤꽃을 피우고 밤송이가 열리게 할 것이다 라고 시인은 당당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두나무는 벌레 먹은 열매들을 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단물을 올려줌으로써 씨알을 여물게 해주는 죽은 생명까지도 살리려는 헌신적인 활동을 하며(<자두나무>) 쪼글쪼글해진 풋사과 안에 쟁여둔 단물과 빚어놓은 씨앗을 발견해 내며 노인의 주름살과 대비되어 그 주름살은 내부로 가는 길이며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라고 이야기한다.(<풋사과의 주름살>) 이런 행위들을 보면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데 한 식물이 갖는 생명의 세계가 인간과 똑같은 무게의 살아가는 힘을 지닌 듯이 묘사된다.

이런 역동적인 모습은 대나무에서 찾을 수 있는데 <대를 쪼개다>와 <마디>에서 잘 나타나 있다. 대나무를 쪼개는 행위는 대나무를 죽이는 행위임에도 이 시에서 대나무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대나무는 단단하게 여문 텅 빔으로 온몸에 꽂은 시퍼런 칼잎으로 화음을 만들고 있다. <마디>에서 '마디'는 곧 생명이다. 마디를 모르는 것들, 즉 이파리들은 바닥을 덮고 썩어가고 있다. 그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은 하얀 대뿌리이다. 여기에서 마디가 생명의 징표임을 알 수 있다. 끊임없는 생명의 순환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힘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시인은 정적인 행위 또한 동적으로 바꿔 놓는데 때깔이며 모냥이 같은 게 없는 씨앗이, 흠 없는 씨앗이 씨앗을 틔우고 한 가지 맘으로 골똘해지면 종묘사에서 일하는 여자의 자식들이 그러하듯 원하는 색깔로 남실거린다.(<씨앗 파는 여자>) 가슴 위에 돌을 안은 채, 숲이 된 석수조차도 겨드랑이에서 돌 쪼는 소리가 부서지고(<상석>) 참깨가 여물어 꽃망울들이 말라죽는 것을 괴로워하며 앙다물었던 입술이 터지며 바닥에 하얗게 사리가 쏟아진다.(<참깨>)

무엇보다 놀란 것은 죽음에 대한 시인의 관점이다. 자서에서 내 시는 쥐좆이라고 말한 시인은 뒤 표지에 이르러

죄다 썩어주마!/어린 참나무 밑동, 상수리 하나/땅바닥 가까이로 주둥이가 여려 있다.//상수리의 입이 썩으며/산 하나가 부풀어오른다.//네가 내 실마리다.

라고 말한다. 식물은 낙엽으로 떨어지고, 그 떨어진 낙엽이 썩어 비료가 되고, 그것이 다시 새 생명을 움트게 하는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새로운 잉태를 위해서 죄다 썩어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살구꽃은 노인의 손에서 개화가 되고('살구꽃') 이발소를 닫는 아버지가 입석을 긑내고 텅 빈 대합실로 다시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 나뭇결처럼 환해진다.('장평 이발소') 겨울이 되면 이파리들은 자기들을 파먹은 벌레들을 훗훗하게 덮어주고 나무의 씨앗은 그 이파리들 안에서 벌레들과 동침하고 있음을 나무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그 이파리들로 산자락을 덮고 있다.('손')

지금껏 나에 급급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시인은 보고 있었다. 나에서 멀어져서 좀 더 넓은 자연, 좀 더 큰 생명을 보고 있었다. 그가 그의 시를 통해 자연의 섭리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자연의 섭리에서 사람이 잊고 지내던 것을 생각해 내고 그 것을 통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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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44
남진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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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내게 동기녀석 하나가 '너랑 비슷한 이미지니까 쉽겠네'라고 했다. 그만큼 이 책 한 권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여느 다른 시인들이 다룬 '죽음'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가볍다. 시인에게 절실하지가 않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읽힌다. 작년 과제로 읽었던 최승자의 시집 두 권은 읽는 내내 숨이 막혀 꽤나 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이 '타오르는 책'에서의 죽음은 내 숨을 조르지 않았다.

남진우가 다룬 죽음의 가장 큰 이미지는 '허무'와 '붉음'이다. '피'를 꽤나 좋아하는 시인이구나 싶을 정도로 시집 도처에 붉은 이미지를 깔아 두었다. '모래'와 '밤'으로 대변되는 허무는 죽음의 이미지를 관념적이고 허무하게 몰아갔다. '죽음'의 이미지만으로 이 시집을 다룬다는 것은 3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앞부분에서는 주로 '책'과 '중세시대'의 이미지로 시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 3장을 택한 것은 시인이 앞장에서도 이 죽음을 간과하고 지나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잠'은 죽음에 가장 근접해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시인은 모래사나이가 서벅거리며 다가오는 밤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 모래는 집을 지을 수 없는 쓸모 없는 도구이다. 그런 모래는 끈임 없이 시인을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시인은 꿈속에서도 사막을 헤맨다. 그런 모래 대신 잠 못 이루는 밤 내 몸 안의 핏방울이 모래시계로 옮겨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정오에서 죽음은 역동적이고 선명하다. 피는 뜨거워져서 새를 사납게 하고 환한 죽음의 꽃을 피운다. 하지만 자정에서 죽음은 몸 속에서 석탄이 새어나오듯 조금씩 흘러 밤을 만든다. 그리고 두개골에 음울하게 와 부딪는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시인에게 죽음은 절실하지 않다. 그만큼 허무할지언정 우울하지는 않다. 죽어서 매달린 고깃덩이에서 흐르는 피는 단순히 내 머릿속을 채워서 죽은 혀가 지껄이는 말이 아닌 피로 물든 아름다운 말을 내뱉는다. 이는 시인 자신이 죽음이 멀리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멀리서 밤을 이끌고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시체조차도 신기루로 떠오르는 장작더미 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시인은 죽음을 끊임없이 노래하지만 시인에게 죽음은 두개골을 부딪는 몸이 아닌 머리로 느끼는 관념의 상관물일 뿐이다.

죽음은 항상 무겁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으로 마음으로 절실하게 느끼면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인은 죽음을 단순히 관념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시인은 자신에게서만큼은 멀리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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