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구판절판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바로 그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지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古文)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아니, 더 나아가 관료로서의 진부한 코스를 어찌 선택할 수 있었으랴. 어떻게든 과거에 입문시키려는 주최측의 그물망을 피해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했던 근본적인 잉가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포획과 탈주, 이후에도 이런 '시소 게임'은 계속된다. 뒤늦게 음관으로 진출했을 때, 음관들을 위한 특별 시험을 실시하면서 한 사람도 빠지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그는 근무지인 경기도 제릉으로 '날쎄게' 달아난다. 과거를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시험을 치르게 하여 관료로 진출시키려는 포섭의 기획을 계속 와해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46-47쪽

살아 있는 석치(정철조)라면, 만나서 곡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조문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꾸짖을 수도 있고, 만나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들이킬 수도 있어서, 벌거벗은 서로의 몸을 치고박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 하는 것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속이 뒤집어지고 어지러워, 거의 다 죽게 되어서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정말로 죽었구나 ...석치 자네는 정말 죽었는가? 귓바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는가?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술을 쳐서 제주(祭酒)로 드려도 정말 마시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구나.
- 박지원,<제정석치문>-82쪽

유인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중미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셋이었다.(중략)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을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 박지원,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83-85쪽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중략)
그들이 보기에도 정조는 연암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나 이 노회한 조치에 대해 연암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보잘것없는 책이 위로 임금님의 맑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느냐, (중략)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느"냐며 결국 반성문 하나 제출하지 않는다. 당근도 채찍도 모두 비껴간 것이다. 문체반정 이후 대부분의 문인들이 견책을 면하기 위해 혹은 영달을 위해 철저한 고문주의자로 변모해 갔지만, 연암은 이후에도 정조의 견제, 아니 집요한 '구애의 손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뱀처럼 유연하고, 두꺼비처럼 의뭉스럽게.-129-131쪽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후에야 정덕이 될 것이다. 대체 이용이 되지 않고서 후생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니, 생활이 이미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요.
박지원 <도강록>-197쪽

<일신수필>에서 그는 우리나라 선비들의 북경 유람을 이렇게 분류한다. 상사(上士:상등으로 인정받는 선비)는 황제 이하 모두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되놈이고 되놈은 곧 짐승이라 볼 것이 없다고 하고, 중사(中士)는 장성의 시설 및 무장상태를 눈여겨 보고서는 "진실로 1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다면 급히 달려 산해관을 쳐들어가서, 중원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라고 한다. (중략) 나와 같은 사람은 하사(下士)이지마는 이제 한 말을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왓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 있다'고 하련다" (중략)
기왓조각은 천하에 버리는 물건이지만 이를 둘씩 포개면 물결무늬가 되고, 넷씩 포개면 둥근 고리모양이 되니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가 이에서 나온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는 아끼기를 금싸라기처럼 여기어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다닌다. -288-290쪽

참으로 과격한 논법 아닌가? 패관잡서를 천지간에 비할 데 없는 재앙이라 규정지으며 책자를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 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리자니. 마치 불순분자를 뿌리뽑겠다는 '공안검사'의 선전포고가 연상될 정도로 그(정약용-인용자주)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문체반정을 진두지휘한 국왕 정조의 입장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연암협 골짜기에 은거하면서 배후조종자로 낙인찍힌 연암과 최선봉에서 발본색원을 외치는 다산. 한 사람이 부도 권세도 없는 50대 문장가라면, 또 한 사람은 생의 하이라이트를 맞이하고 있는 젊은 관료였다.
흥미롭게도 이런 대칭적 배치는 그들의 출신성분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히 전도되어 있다. 연암이 집권당파인 노론벌열층의 일원인 반면,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의 일원이었다. 그럼에도 연암은 애초부터 과거를 거부하고 권력 외부에서 떠돌며 문체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열어젖혔고, 그에 반해 다산은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하여 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 도중이었다. 한쪽이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계속 미끄러져 나간 '분열자'의 행보를 걸었다면, 다산은 주변부에서 계속 중심부를 향해 진입한 '정착민'의 길을 갔던 셈이다. 중략) 정치 또는 국가권력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둘은 상호 역방향을 취한다. 연암은 권력으로부터 계속 비껴나간 데 비해, 다산은 정조의 사후 유배생활 기간에도 중앙권력을 향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361-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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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7-08-12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지원처럼 생각하고 고미숙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