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박지향.김일영.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일기장에다 그를 "너무나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라고 썼다. 1954년 그를 만나러 가기 전 대통령은 비서인 해거티에게 그를 언제까지 붙들어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약한 소리를 한다. "(그가  주장하는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너무 엄청날 걸세." 미국인들은 그를 <동양의 협상가>, <기만의 대가>, <형편없는 패를 들고도 공갈로 이기는 노름꾼>으로 평가했는데,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공갈협박으로 그는 매년  미국 국민의 혈세를 10억 달러씩이나 우려내고 있었다. 한국의 국내수입이 5억 달러도 안되던 시절에 말이다. 미사일을 뻥뻥 쏘아대며 미국을 협박하는 누군가의 <벼랑끝 외교>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일화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권이 다각도로 보여주는 1945년에서 50년대 말까지, 광복과 그 후의 혼란, 한국 전쟁과 한미 동맹, 농지 개혁, 경제 정책, 사회 변화의 중심에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있다. 수록 논문의 저자들은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저 두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았다는 사실이다.

명망 있는 해외파 독립 운동가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혼란스러운 해방 공간을 발빠르게 움직여 권력을 손에 넣는다.  끼고 있는 패트런은 미국과 소련으로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의 정책은 비슷했다. 우선은 일본인소유 재산들을 장악하고,  다음으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해 소작인에게 나누어주었다. 토지 개혁은 교육받은 지주층을 몰락시켜 반대 세력을 제거해 주고, 절대 다수인 농민층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상대 정권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  미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한다. 

3년간의 전쟁으로 160만명이 끔찍한 죽음을 당했지만  이승만과 김일성만은 끄떡 없었다. 원망과 증오가 커질수록 두 사람의 권력은 확고해졌으니까. 전쟁은 적과 아군의 개념을 가르쳤고, 전통적 가치를 따르던 농부들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 조직했다.  국가의 위기라는 명분을 이용해 두 사람은 효과적으로 정적들을 숙청했다. 이승만은 안전한 부산에 앉아  휴전 협정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에게는 전선에서 죽어가는 하찮은 젊은이들보다는 "조국 통일"의 숭고한 열망이 훨씬 중요했다.

휴전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뜯어온 원조금으로 관료 조직을 정비하고, 선거의 뒷돈을 댈 재벌 자본가들을 육성했다. 1948년 5만명에서 1954년 65만명으로 늘어난 군대가 젊은이들을 훈련시켰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근대 국가의 규범을 가르쳤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아이들이 4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직 훗날의 일.  비대해진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도, 군사 정권이 재벌을 앞세운 경제 개발을 이룰 것도 이승만은 알지 못했으리라.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국사의 연속성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그들의 시대가 우리 시대의 바로 전단계로서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이 이 땅에 도입한 초기 단계의 근대 국가에다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더해 거대하고 효율적이며 강력한 지배 구조를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은 두 사람의 손에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특히 태평양전쟁기의 차별과 배제, 억압과 선동, 인권을 경시하고 소수를 박해하는 전체주의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직접적 계승자이며, 정치적 쌍생아이자 적대적 공범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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