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게 뭔가 하고 한숨을 쉰다. 영어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지나 아예 열등감에 시달린다. 세상의 중심에서 역사가 내달리는 동안 변방에 뒤쳐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테고,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압도해 오는 서구 문명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도 나만은 아니겠지. 그런 점에서 절대왕정기 오스만  술탄의 화가들인 나비, 올리브, 황새, 엘레강스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은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서구 국가의 먹물들이 너나없이 느끼는 초조감의 서곡이 아닐까.

장인에게서 도제에게로 존경과 애증, 폭력과 에로스와 더불어 비밀스럽게 이어져 온 엄격한 전통의 토대 위에서 "신이 보시는 세상"을 재현해 왔던 오스만 화가들은  "내가 보는 세상"을 그려내는 서구의 혁명적 신기술 원근법 앞에서 경악하면서도 매료된다. 격렬한 욕망과 죄책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달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번영하는 수도의 화려한 하늘 위에 서서히 쇠퇴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 눈물겨운 아름다움과 눈물겨운 쓸쓸함을 이 작가가 얼마나 생동감 있게 그려 내는지 책을 읽는 내내 이스탄불의 거리에, 빵굽는 냄새와 시장의 소음에 섞여 있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이하고 신선하며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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