넙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4
귄터 그라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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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길고 재미있는 소설을 기대하고 <양철북> 작가의 소설을 골랐는데 처음부터 읽기가 쉽지 않았다.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줄이자면 말하는 넙치가 들려주는 4천년 역사에 대한 증언이라고 하면 될까?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소설의 서술자가 증언자 넙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인칭 서술자의 성격이 계속 바뀌는 데다, 시와 재담들, 대화들과 논쟁들, 기록들과 논평들이 시간 순서를 무시한 채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뒷표지에 있는 발트해의 율리시즈라는 미디어의 평은 이 산만하기 짝이 없는 구성을 점잖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성인 서술자(또는 서술자들)와 넙치가 들려주는 이 4천년 역사의 주인공은 저마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열한 명의 여성들이다. 신석기 시대의 여자 부족장 아우아, 4세기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시대를 살았던 비가,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프라하 주교와 대립했던 11세기의 메스트비나, 14세기의 검 제조 장인의 아내이며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몬타우의 도로테아, 16세기에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도시 귀족과 길드 장인들의 대립 사이에서 자기만의 성을 지키며 대항해시대의 후추 교역에도 관여했던 수녀원장 마르가레테 루쉬, 17세기 외교의 격랑을 헤쳐나간 두 사람의 예술가를 지탱했던 부엌데기 하녀 아그네스 쿠르비엘라, 18세기 프로이센의 농노들 사이에 신대륙에서 온 감자를 보급했던 아만다 보이케, 나폴레옹 점령하의 단치히에서 프랑스인 총독의 요리사 일을 하며 감옥에 갇힌 혁명가 애인을 기다렸던 조피 로트촐, 19세가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프롤레타리아 요리책을 저술한 레나 슈투베, 2차대전 이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혼란 속에서 희생된 지빌레(빌리) 미일라우, 그리고 1970년 겨울 조선소 파업에서 파업 노동자를 겨눈 사회주의 국가 권력의 총구 앞에서 연인을 잃고 미혼모가 된 마리아 쿠츠초라. 이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인 여자 요리사는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생명을 기르는 여성성을 암시한다.

 

그 생명의 지배력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던 남성들의 앞에 넙치는 스승이자 조언자로 등장하여 순응하는 삶을 거부하고 역사의 변화를 주도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넙치가 바랐던 이성과 진보의 역사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얼룩져가고, 20세기에 이르러 넙치는 여성들의 조언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희망을 가지고 여성 법정에 서서 과거의 죄에 대한 재판을 받는다. 재판정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되는 역사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갈등 양상을 담아내고 있으며, 남성 서술자()와 여성 주인공()의 관계 또한 사랑과 증오, 대립과 협력 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군데군데 숨겨져 있는 유머들에서 위로를 찾으며, 어렵고 산만한 것을 꾹 참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던 이야기가 점차 급박해지면서 감동적이 되어 가는 것은 2권 중반이 지나서였다. 작가의 고향 단치히를 배경으로 유장하게 흘러오던 역사가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작가가 체험했던 소망과 아픔들이 이야기 안에 좀 더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사회주의 운동, 히틀러의 등장, 동서 분단과 냉전의 시대가 숨 가쁘게 흘러가는 동안,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처럼 호소력과 감동에 푹 빠져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고, 다 읽고 나서는 뿌듯한 여운과 만족감에 잠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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