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2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가 되면 인물의 이름 붙이는 일이 무척 즐거울 것 같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면 발음뿐 아니라 글자의 의미를 곰곰히 따져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삼대 경관들의 성은 안전을 지키는 성이라는 안조(安城). 이름은 차례로 세이지(淸二),  다미오(民雄), 가즈야(和也)이다. 

전쟁으로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1948년, 단 두 달의 훈련을 받고 경시청 순사가 된 세이지(淸二)는 마음이 맑은 청년이다. 그는 상냥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바람대로 골목길 주재소에서 가족과 함께 근무하는 순사가 된다.  그 세이지가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충고에 따라 지은 아들의 이름은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는  뜻의 다미오(民雄)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손에서 어렵게 자란 다미오는  아버지를 닮은 경찰이 되려 하지만,  격렬한 이념 투쟁 시대의 가혹한 공안 업무는 그의 정신을 걷잡을 수 없이 파괴한다.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바랐던 보통 사람들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 다미오는 괴로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삼세 경관이라는 주위의 기대 속에서 경시청 형사가 된 가즈야(和也)가 찾아낸 조화로운 해답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시대를 산 다른 성격의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의 영혼에는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정의를 위한 사명감 같은 거창한 것과는 다르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권위주의자나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는 출세주의자, 아니면 적어도 명령지상주의의 단순한 인물이기라도 했더라면 이들이 겪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조 가의 경관들은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산다. 냉대받던 남창의 죽음 뒤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추적하고, 구타당하는 아이 엄마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사를 방해하는 상부와 위험한 거래를 벌인다. 그것을 위해 때때로 자신들을 길러준, 그들 자신의 충성과 애정의 대상이기도 한 경찰 조직. 국가 권력과 대립하는 상황에 서는 것을 감수한다.

이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세상에서, 세 사람의 경관은 각자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고 싸운다. 결코 쉽지 않은 그 싸움이 그들의 안정과 평화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아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바꾸면서, 싸움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국가가 인간을 파괴할 때, 국가에 속하는 경관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작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경관의 영혼에, 대를 이어 그의  심장 속을 흐르는 '경관의 피'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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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2-2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보도연맹 관련 뉴스를 보면서 이 리뷰에 썼던 목가적인 감상은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니까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경찰 3대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1대는 빨갱이 토벌 와중의 민간인 학살, 2대는 박정희 정권 하의 불법 연행과 고문, 3대는 촛불 시위대에 대한 폭력 진압... 이웃나라인데도 경찰 이미지는 너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