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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창공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해 보니 무라카미 류의 소설도 이걸로 다섯 권째 읽는다. 별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본 '69'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고 '5분 후의 세계'나 '인 더 미소수프'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나 이 책이나 하나같이 어렵다. 막 빨려들어가서 정신 없이 읽는데 다 읽고 나서 정리가 안된다. 재미있기는 한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글은 무지하게 잘 쓰지만 어딘지 이상한 작가.
이 책의 원제는 '엑스타시'이고, 주된 소재는 마약과 섹스, 그 중에서도 하드한 SM 플레이이다. 한국에서 출간됐으면 법정 시비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전혀, 조금도, 에로틱하지 않다. 너무 놀라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에로 따위는 저만치 도망가 버린다.
화자의 눈을 통해 제시되는 야자키, 게이코, 레이코라는 삼인조는 돈을 물쓰듯 쓰며 마약과 섹스에 탐닉하는 인물들이다.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이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끌어들여 폐인 만들기를 즐긴다는 것. 게다가 세 남녀 모두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가졌댄다.
사디스트, 님포마니아, 코카인과 엑스타시와 LSD... 전부 다 내 평범한 인생하고는 너무나 너무나 동떨어져서 조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냥 판타지' 라고 밀어버리기엔 어딘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 것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질척질척한 음울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도대체 이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참 고민한 끝에 결국 평가를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가능성만을 보고 지나가자. 내가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면에서부터 산산히 부숴버리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만 생각하자. 내 앞에 놓인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무엇 또는 기괴하기만 한 누군가와 마주쳐도 당황해서 흥분하지 않도록. 삶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고, 쉽게 풀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소설이 해야할 일 중의 하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