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목적론적이다. ‘관객을 깨우’거나 우리를 좀 더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이런 식의 목적은 쉽게 허세, 독선, 그리고 거들먹거리는 개소리로 타락할 수 있으나 목적 자체는 원대하고 고결하다.) (아래에 계속) - P145
(위에서 계속) 상업 영화는 관객을 가르치거나 일깨우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상업 영화의 목적은 ‘여흥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것은 대체로 관객에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주고 관객의 실제 인생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더 일관적이고 더 매혹적이고 매력적이며 전반적으로 더 재미있는 인생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다양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상업 영화의 목적은 사람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극히 편안한 잠과 달콤한 꿈을 제공함으로써 그 경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혹, 돈과 환상의 거래가 상업 영화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예술 영화의 목적은 대체로 좀 더 학구적이거나 미적이며 대개 해석에 노력을 기울여야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예술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는 것은 돈을 내고 노력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 - P145
‘직업 여행기’를 설명하자면 일단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진짜로 가볼 수 없는 장소와 문화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픽션을 읽었다는 점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기능은 오늘날의 여객기, TV 등 덕분에 사라지다시피 했다. 반면 현대 기술이 만들어낸 직업의 극단적인 전문화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종사하고 잇는 전문 분야 외의 분야에 대해 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픽션의 ‘관광’ 기능은 이제 독자에게 다양한 학문과 전문 분야의 실무 영역으로 극화된 접근권을 주는 쪽으로 작용한다. -수학과 수학 멜로 드라마 - P229
좋은 작가는 그 자체로 좋은 독자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추천사와 예술학 석사 과정의 바탕이 되는 추론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거짓이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64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無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65
‘편파성’은 물론 처음부터 언급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용어다. 호튼 미플린 출판사는 아마도 주춤할 것이며 아무리 안심시키려는 맥락이라도 이 용어가 객원 편집자 서문에 언급되지 않는 편을 선호할 것이다. 안심시키고자 이런 식의 수사법을 시도하는 것은 시도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다. (말하자면 베이비시터 일을 구하기 위해 개인 구직 광고를 내면서 하단에 ‘걱정할 거 없음! 소아성애자 아님!이라고 넣는 것이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67
모두다 영리한 글이며 유려하게 썼다. 그러나 이 글들이 나에게 가장 큰 가치가 있는 이유는 특별한 정직성을 가지고 사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79
우파, 신좌파 무엇이 되었든 그 도그마의 매력과 심리는 동일하다. 혼란스럽거나 매몰될 것 같은 기분, 무식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미 알고 있으며 무엇을 더 학습하든 알고 있는 것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도그마에 이런 식으로 발 맞추는 행위는 내가 말하는 피할 수 없는 의존과는 다르다. 아니, 오히려 가장 극단적이고 겁을 먹은 형태의 의존이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78
이 객원 편집자의 서문에서 충분히 논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선정작을 고를 때 노골적으로 그리고 편파적으로 선호한 에세이는 바로 반사적인 도그마를 약화시키는, 성실하고 전폭적으로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들이다. 공립학교에서 과학과 함께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멍청한 근본주의자들이나 모든 진지한 기독교인이 근본주의자들처럼 멍청하다고 고집하는 냉소적인 유물론자들처럼 좁은 구멍에 맞지 않는 현실을 죄다 삭제해버리는 행위를 피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79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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