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중략) 철학이 생산되는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중략) 철학 수입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울퉁불퉁함이 지적 사유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 울퉁불퉁함은 특수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개별적 구체성으로만 있다. - P9

원래 동양에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특별한 지적 형식이 없었다. ‘철학’이라는 지적 형식에 맞출 수 있는 내용은 있었지만, 그런 제목을 단 독립적 형식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양 철학’ ‘중국 철학’ 혹은 ‘한국 철학’이라고 하면, 다루는 자료가 과거의 것들이기 때문에 매우 오래된 학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신흥 학문에 속한다. ‘동양 철학’은 동양의 사상적 혹은 지적 자료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한국 철학’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사상적이고 지적인 자료를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이 방법이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것이다. - P36

‘인문人文’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개괄해 이해한다.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란 모두 이 인간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면 전략적이다. 그 차원에서라야 비로소 상상이니 창의니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상상이니 창의니 하는 일들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일 뿐, 그 아래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 P73

조선의 많은 철학자들은 사실 철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주희(주자)를 닮으려고 안달이었다. 조선의 종속성은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에도 "조선의 철학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교인이 철학적이기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 P90

나는 자연과학이나 부강함이 바로 문화력에서 나온다고 본다. 행복, 인의, 자유, 사랑과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의 높이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단계다. 행복이나 인의나 자비 등과 같은 덕목은 그냥 개인적인 마음 씀씀이 정도로 치부될 일이 아니다. 이런 덕목들이 기능한다는 것은 이런 덕목들이 발휘될 정도로 고양된 인격을 가진 구성원들로 사회가 채워져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고양된 인격의 소유자들이 발휘하는 시선이나 활동성은 단계가 매우 높다. - P111

나는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자주 가지 않았었다. 가서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까? 그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높이와 내 시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기서 재미가 생길 수 없다. 일치해야만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자신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박물관이나 갤러리는 인간의 지성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하고, 또 성장된 지성의 높이를 가져야만 즐길 수 있다.
- P126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직선적으로 완수한 탄력으로 바로 선진화로 진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정체를 알기 힘든 투명한 (추상적인) 벽 앞에 서서 당황하고 있다. 그 벽에 막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심지어는 건국 세력까지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건국 세력은 건국할 때의 틀로,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틀만 가지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을 뿐이다. - P138

인간이 독립을 시도하면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역사에 책임성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책임성은 믿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독립적으로 발휘하는 태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 P167

한국 학생들은 단체 여행을 할 때 여행 내내 개별적인 행동은 전혀 없이 집단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집단으로 모여 있고 뭔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학생들의 단체 여행은 그렇지 않다. 모두 함께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프로그램이 아니면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기차 타고 이동할 때도 우리 학생들은 게임 등을 하면서 다 함께 뭉쳐 있는데, 미국 학생들은 혼자 책을 본다든지 혼자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해서 우리가 함께 여행 온 사람들인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어떤 모습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일 것이다. - P176

공동체나 집단에 선험적 절대성을 부여하게 되면 마치 공동체나 집단을 절대선을 가진 고정 불변의 존재로 받아들이기가 십상이다. 집단에는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개별과 보편, 개인과 집단, 개별자와 공동체 등으로 나누어놓고 저울질하다 보면 당연히 무게중심이 보편이나 집단이나 공동체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집단은 대개 ‘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 P177

우리가 보통 개별적 주체들의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다. 더군다나 내면화된 보편성은 우주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정치적 이념의 공유자들끼리 나누는 보편성이거나 진영의 좁다란 보편성이어서 그렇게 넓고 높지도 않다. 이런 주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공동체는 주체들의 자발성이 발휘되지 못하여 사회가 경색되기 쉽다. 이런 구조에서는 문명의 진행 방향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반응할 수 없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 P177

장자는 가치의 결탁물인 자기를 ‘아我’로 표현하고,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난 자기를 ‘오吾’로 새겼다. 가치관으로 결탁된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기 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다. 그래서 무아는 ‘진아眞我’와 같아진다. 진인으로 새롭게 등장한달지 진아로 우뚝 서는 일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을 반성이라고도 하고, 각성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독립적 주체라 한다. - P216

능동적 주체를 장자 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지배하던 규정적 관념, 즉 성심成心으로부터 벗어난 소요逍遙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유自由’라고 표현해도 된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중략) 자기 이외의 것들은 자기를 키우고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 P220

고전에 있는 ‘진리적’인 것들이 당시의 구체적인 세계와 어떤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한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 P2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