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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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가 인기 있는 것을 보고 조금 궁금했던 김영하의 여행기. 달리기를 하지 않고 출신 대학을 사랑하는, 한국 남자 버전의 무라카미 하루키? 읽기 편하게 글을 잘 쓴다는 건 인정. 그러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지도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동네들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도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 없다면 수업은 맥이 빠진다. 내겐 그게 없었다. 과연 소설 쓰기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것일까? 내가 가르치면 뭐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 늘 이런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 P22

1960년대 갓 취업한 이십대의 젊은이는 첫 월급의 반 이상을 양복을 구입하는 데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방직기술의 발전과 값싼 재료의 등장으로 옷값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낮아졌다. 덕분에 옷장은 입지도 않는 옷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 P33

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밤늦도록 일하고도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그리젠토의 신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찍고 그 위로 흘러가는 구름떼를 찍었다. 아무리 시칠리아라도 12월의 새벽은 추웠다. 카메라맨은 홑겹의 윈드브레이커 하나로 묵묵히 새벽 추위를 견디며 뷰파인더를 노려보았다. ‘느린 다큐’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오랜 촬영이 필요했다. 몇 시간 동안 타임랩스로 찍은 화면을 삼 초에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느린 다큐’의 정체였고 우리가 이런 영상을 TV에서 자주 보지 못하는 이유였다. (중략) 카메라맨과 프로듀서는 아무 불평 없이 이런 화면들을 찍었다.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사이라더니,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이었다. 나약한 소설가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는 동안 그들은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벌판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을 했다.
- P48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로서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사람,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석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팔레르모 공항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P50

배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며 정세를 살피는 우리에게 바르톨로 빌리니 씨와 한 명의 노파가 다가왔는데 모두 자기 아파트를 설명하는 명함 크기의 광고지를 들고 있었다. 그 광고지는 하나같이 ‘발코니, 냉장고, 샤워, 부엌’을 강조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고 동네에서 사온 신선한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또한 그것은 다소 억지스럽지만, 세계가 물, 불, 흙, 그리고 공기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그러나 그는 지금의 그리스가 아닌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에서 태어났다)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을 연상시켰다. 샤워는 물, 부엌은 불, 발코니는 흙, 마지막으로 냉장고는 (차가운) 공기와 관련돼 있다. 이 네 가지는 현대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오래 어딘가에 머물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83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연기과 대학생들이 이런 무거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은 사실 역부족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가가 붙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연기하는 그리스극을 보는 맛은 따로 있다. 장황한 그리스 운문을 번역한 부자연스런 한국어 대사,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기, 코러스와 대사의 부조화 때문에 관객들은 극 속으로 결코 깊이 빠져들지 못한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효과’가 여기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달성된다. "오레스테아"를 보는 내내 나는 연극이 촉발한 딴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 P161

돌아보면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여행하기에 가장 안전한 시대였다. 민간 항공기가 출현했고 해적이나 산적, 마적은 거의 사라졌다. 나라와 나라 간의 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단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안정돼 있어 달러만 가지면 어느 나라에서든 밥을 사 먹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9.11 테러 이후로 그런 시대는 이제 서서히 저물고 있다. 위험지역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우티스들도 부유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 (중략) 지금 와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20세기만이 오히려 예외처럼 보인다. 중세에는 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도 해적질과 인신납치가 성행했으며 귀족들조차 친지들이 몸값을 내주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팔려가곤 했다.
- P200

시라쿠사는 그리스문명의 토대 위에 로마문화를 더하고 그 위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한, 일종의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눈에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을 일별할 수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시라쿠사에서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사랑한 그리스인들과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로마인들의 차이는 그들이 지어놓고 떠난 극장과 경기장으로 드러난다. (중략) 그리스극장과 로마경기장 사이에는 거대한 채석장이 있다. 기원전 413년에 사로잡힌 아테네 포로들이 노역을 하다가 노예로 팔려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본래는 꽤 높은 언덕이었던 이곳은 유명한 1693년의 지진과 오랜 세월의 채석으로 인해 지금은 한 입 크게 베어 문 사과처럼 아래로 푹 꺼져 있고 군데군데 올리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리스 후예들이 비극 "아가멤논"을 보고 있는 동안 로ㄴ마의 후예들은 유로2008에 출전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러 카페에 모여 있었다.
- P220

우리가 묵은 호텔의 주인은 아그리젠토 남자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흰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서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정중했다. 자신의 힘과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면서도 필요한 친절은 잊지 않았다. 허겁지겁 메뉴를 결정하려는 우리를 만류하며 그는 우아한 태도로 차가운 물 한잔을 권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중략)
그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ignora, prego. E 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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