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들은, 쉽게 말하면, 땅을 바라보고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땅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독특한 판단력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건축가들에게는 우연한 만남이지만, 안성면에서 펼쳐진 흔치 않은 땅과 필자 사이의 교감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한 남자가 평생 그리워하던 여인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버갯불이 튀는 듯한 사건이라고 할까? 그런 정도의 열정적인 교감이 안성면과 필자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것이 한 건축가를 10여 년 동안 무주에서 일하게 한 계기다. - P28
무주에서 10년을 작업하면서 느낀 것은 군청의 모든 직원은 감사원을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 같은 처지다. 직원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일이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아니라 감사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군수라면 감사원이나 검찰이 아니라 군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군민, 주민의 삶을 향상시키려면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어야 한다. 김세웅 무주군수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지금의 시스템, 지금의 건축 발주방식으로는 좋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아주 확고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 P39
필자는 수의계약을 통해 무주 프로젝트를 10년간 진행할 수 있었다. 군수는 여러 가지 일로 검찰에 두 차례나 소환당했다. 심지어는 필자도 검찰에 불려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필자는 검찰이 정말로 필자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의계약이라는 것은 규모가 큰 설계 일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진행해야 하는 터라 일을 할수록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검찰이 부르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게 근거자료를 만들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 P40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으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식물은 무엇으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것인가? 바로, 흐르는 시간이다. (중략) 특히 불특정 다수의 삶과 관계있는 공공건축은 다중의 삶을 미리 확정하는 일이기도 해서 보편적이면서도 시간에 따르는 변화 또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까지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 결정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서 건축가가 이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은 건축이 지닌 근원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미리 예측하며, 불확정적인 것까지 오늘 확정할 수 있는 지혜와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P43
도시는 자연을 먹고사는 짐승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도시라 하더라도 안성면처럼 자연에 세우는 도시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보다 1000배, 1만 배 이상의 이익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연에 또 그 땅을 지킨 주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런 한도 내에서만 기업도시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P87
건물에서의 창은 풍경을 오려내고 안으로 불러들인다. 불려온 풍경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안에 있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 P95
부남면을 논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부남면이 별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부남면에 별 보는 집을 지은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필자가 선사하고 싶었던 부남면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결되었다. 건축가는 건물만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의미 있게 조직해 주는 사람인데, 부남면 같은 오지의 면사무소를 리노베이션 한다는 것이 바로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P100
공공건축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람, 주민,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그리고 끝으로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건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실 아무리 작은 공공건축이라 해도 건축을 제안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상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113
관공서 건물은 두 가지 점에서 선도적이어야 한다. 하나는 도시 환경 속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건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어서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시민들과 호흡하는 편안한 장소, 그런 공적 영역의 특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관공서 건물은 지금이라도 개선의 여지를 두고 노력해야 한다. - P139
어떻게 보면, 어른들은 ‘형식’을 아이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더 잘 포착해 낸다. 건축의 내외부 공간을 미끄러지듯 즐겁고 유쾌하게 넘나드는 아이들의 몸짓 속에 진정한 건축이 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공간 속에서 조직해 내는 능력은 신비할 정도다. (중략) 어른 건축가들은 유쾌하게 놀 줄 모른다. 유쾌한 어린이집. 그것은 아이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른 건축가들은 그것을 찾는 방식을 개발해야 할 것 같다. - P186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특별한 산인 적상산은 가을에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적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P202
섬세하고 작은 것들의 축적을 고마워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사회는 진정으로 한 발자국씩 진보할 것이다.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 무주군 보건의료원은 큰 건물이 아니라 보건의료원을 작동시키는 작은 마음들의 결집 속에 큰 위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62
지난 10여 년간 필자가 무주에서 한 작업들은 그래서 필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어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holistic approach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297
건축이 탈산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능과 공간으로 포섭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할 일이 아니라 근접성의 법칙과 체험에 각인되는 삶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체험은 정신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가까운 것들’. 사랑, 평화, 애정이 깃든 모든 것은 근접한 데서 시작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 P298
필자가 공설운동장만이 아니라 무주에서 한 수많은 일은 건축가의 새로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social coordinator’로서의 역할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현대 건축가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단력 있게 조절하고 건축의 행위로 이행시키는 사람이다. - P306
감응. 감응이라고 하는 키워드. 무주의 모든 일은 감응인 것 같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rrespondence. 쌍방적인 것. 무엇을 느끼고 응하고...... (중략) 무주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도 그렇고 또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등도 그렇고, 내가 보통 때 건축하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감응은 쌍방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자연과 풍경과 말씨와 음식 등의 친근함에서 오는 프록시proxy의 미, 내가 무주에 살지 않지만 무주에 사는 사람의 풍경에 감응되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P330
무주 프로젝트를 돌아보면서, 이런 공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쓰임새와 구조, 생김새 등을 협의해 결정지은 건축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양쪽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은 이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우선은 김세웅 전 무주군수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종의 ‘전횡’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또한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가지고 있는 ‘폭력’이란 게 있다. 건축가들은 이처럼 자기가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상황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한다. 사실 건축가들이야말로 그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 무시무시하게 빠른 사람들이다. 무주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지방자치단체장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건축가들의 숙명적인 직업적인 권력, 그 두 권력이 우연히도 충돌하지 않고 결합된 것이다. 그 두 권력이 결합돼서 마치 새로운 사건처럼 탄생한 것이다. (계속) - P365
(위에서 계속) 하지만 권력이 모였을 때 공공건축물을 가능하게 한 걸 보면서, 과연 공공건축이란 게 꼭 그렇게 나와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P365
당시 무주군 조례는, 용역비 3,000만 원 이상이면 공개입찰, 그리고 3,000만 원 미만이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공건축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정기용 선생은, 무주군과 수의계약을 맺기 위해 설계비, 감리비 한도를 모두 3,000만원 이하로 낮춰야 했다. 때로는 실비도 안 나올 때도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사무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용 건축이 입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컸느냐고 물어보니, 한 실장은 "무주 프로젝트 때문에 밀린 월급 700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퇴사한 직원들도 아직 ‘무주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회사가 얼마나 골병이 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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