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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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쾌하고 불편한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필자는 상처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알리는 일과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글로 표현하도록 돕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필요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만난 남들의 상처에 필자 자신의 상처까지 더해서 끝없이 늘어놓고 이해와 공감을 끝없이 요구하는 글들을 읽고 있자니 피로감이 쌓인다. 가족의 죽음이나 성폭력 피해 같은 상처 앞에서는 이쪽도 긴장하게 되지만, 필자에게는 가난도 상처고 채무도 상처고 직장 노동 가사 노동도 상처고 학교 공부도 가족 관계도 전부 상처다. 도대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피해자 아닌 사람이 없다.


이해와 공감은 중요하다. 내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이해와 공감은 발전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만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고객도 아닌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내가 힘들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자기 힘들다는 얘기를 끝도 없이 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그만 좀 징징대라.”하는 생각이 슬며시 올라온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은 사람도 없다. 저마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필사적으로 삶이라는 고해를 헤쳐 나간다. “이 정도는 괜찮아.”, “힘든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많아.”,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야.” 라고 자기를 격려하면서, 다들 힘들지만 참고 열심히 산다. 열심히 산다는 자기 긍정은 자존감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참고 열심히 사는’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쾌해지고 불편해진다.


물론 살다 보면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도와준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은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을 염치라고 부르지 않나? 특히 어린이, 청소년과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부디 파렴치를 정당화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한 젊은 여성은 이런 글을 썼다. (좋은 엄마가 아닌) 엄마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만 연구되고, 자식이 엄마에게 미치는 영향은 왜 연구되지 않는 거죠?
- P60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아기를 안고 공부에 나선 엄마처럼 폐 끼치는 상황을 두려워 말아야 하고 공동체는 아이들을 군말 없이 품어야 한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 P100

일단 쓸 수 있는 걸 쓸 수 있는 데에 썼다. 블로그에 에세이를 쓰고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해 활동했다. (중략) 돈벌이는 별도로 충당했다. 자유기고가를 주업으로 일감이 없을 땐 자서전을 대필하고, 공공기관 백서를 쓰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을 인터뷰해 납품했다. 이 세상에 나쁜 언어를 유포하는 일이 아니면 닥치는 대로 썼고, 원고료를 받아 책과 커피와 쌀을 사먹고 그렇게 살아남아서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문창과 간다고 작가의 길이 보증되고 경영학과 간다고 그 길이 봉쇄되진 않는다. 가장 큰 장벽은 부모의 반대가 아니라 자기 생각의 빈곤이다.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 솟아나는 얘기, 복받치는 불행이 아니라면 무엇을 쓸까.
- P144

"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우리 엄마도 자주 말했다. 속 하나 안 썩이고 없는 것처럼 자란 속 깊은 딸, 엄마의 자랑, 엄마의 보험, 엄마의 친구. 이 모든 명예 훈장은 실은 집안의 일손이자 엄마의 보조 노동력이자 감정 해우소로 딸을 승인하는 몹쓸 언어다. 그 딸들은 며느리가 되어서도 "집안의 사노비" 신세를 면치 못한다.
- P173

A는 인턴십형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 등 애인의 총체적인 살림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6개월간 자취하게 한 후 결혼했다. 인턴십처럼 예비 심사 기간을 두고 판단한 것. B는 단체협약형이다. 일상 업무 분담은 물론 명절 및 양가 부모 생신 때의 역할과 책임까지 치밀한 세부 규정을 마련하고 조인식 후 결혼했다. C는 일상돌파형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 아이스크림을 좀 만들어달라고 했단다. 남편이 깜짝 놀라서 "나 그런 거 못 해. 한 번도 안 해봤어"라고 말하길래 "이때까지 내가 했던 음식들 나도 결혼 전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다 배워서 하는 거야. 당신도 배워서 만들어줘" 라고 요구했다고. 지혜가 샘물처럼 넘치고 용기가 화산처럼 솟구치는 현대 여성들의 처신에 나는 매번 탄복한다.
- P231

호출형 노동자는 시간 관리가 생명이다. ‘시간은 돈’이므로. 돈이 되는 시간 창출을 위해 주도적으로 머리를 싸매야 한다. 나는 취재를 위한 왕복 이동 시간, 원고 집필 시간을 측정해 일을 수주받았고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행했다. 마감 기계로 일하다 보니 나를 호출하는 곳이 불어났고 그럴수록 내 속도에 발맞추지 않는 동료를 견디지 못했다.
프리랜서 생활 5년. 나는 "정확성, 효율성, 생산성을 모토로 삼"는 시간 노예가 되었다. 그 사실을 몰랐고 힘들지도 않았다. 몸에 밴 자기 착취의 습성으로 ‘쪼는 사람’ 없어도 스스로 일하는 근면함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 부지런한 노동자 성향, 즉 강박적 시간관념에 충돌이 일어났다. ‘게으름뱅이들’을 만난 것이다.
- P268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무리한 것들을 ‘싫어도’ 해낸다면 훗날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이 시키는 별의별 일도 ‘싫은데’ 꾸역꾸역 감당할 여지가 있다. 복종은 습관이다. 성찰 없는 순종이 몸에 배면 자기의 좋음과 싫음의 감각은 퇴화한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 P289

전쟁으로 군수산업이 돈을 벌고 힘없는 병사들이 죽어가듯 입시 전쟁에서는 학원산업이 득을 보고 평범한 아이들은 조용히 스러져간다.
- P295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은 5월에 수학여행을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련회였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놀 시간도 안 주고 극기훈련이랑 교육만 시키는 수련회는 딱 질색이라며 다른 애들도 그러기로 했단다. 나는 무조건 지지한다고 했다.
- P303

추천자의 삶의 조건과 목적은 특수하다. 평생 활자와 친했고, 책 보는 게 직업이거나 일과 중 독서 시간 확보가 가능한, 읽는 훈련이 된 일부 계층의 관점이 반영된 목록이다. 그런 책들이, 책을 거의 안 봤거나 볼 시간이 없고 고된 노동과 학습에 지친 이들의 일상에 지적 정서적 쾌락을 주는 ‘좋은 책’으로 스밀 수 있을가. 추천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 P327

저마다 누려야 할 고요와 기분을 방해하는 집단의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면 노키즈존보다 ‘노아재존’이 시급하다. 그러나 생기지 않았고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는 곧 법이고 돈이다. 생산력과 구매력을 가진 집단이기에 은행에서도 음식점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금지하거나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역사상 흑인 전용 화장실은 있었지만 백인 전용 화장실은 없었던 이유와 같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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