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두 대전 사이의 영국의 사회상을 그린 블랙 코미디.
지하철에서 주인공의 1차대전 체험담을 읽으며 낄낄 웃긴 했는데, 조지 오웰의 다른 책들에 비하면 임팩트가 약하다. 그 시대의 유머 코드에는 여성 비하적인 데가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21세기의 감각으로 보기에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두 가지 고백할 게 있다. 하나는 내 인생을 돌이켜볼 때, 내가 해본 것들 중에 정말이지 낚시만큼 흥미를 자극하는 게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략) 또 하나 고백할 것은, 열여섯 살 이후로 내가 다시는 낚시를 해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사는 게 그런 까닭이다. (중략) 우리를 끊임없이 이런저런 백치 같은 짓만 하도록 내모는 악마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는 것이다. - P118

마치 거대한 기계가 우릴 휘어잡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행동한다는 느낌이라곤 없었고, 저항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어던 전쟁도 3개월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모든 부대가 전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 P162

도로를 건설하러 갔다가 어디와도 통하지 않는 막막한 사막만 발견한 공병대대도 있었고, 독일군 순양함을 망보러 먼 바다의 섬에 배치됐다가 배가 몇 해 전에 침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병도 있었고, 임무가 끝났는데도 관성적으로 몇 해씩이나 존속된 행정병과 타자병을 잔뜩 거느린 이런저런 기관도 있었다. 당국이 무의미한 직책을 밑긴 다음, 그 존재를 잊어버린 내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여기 있지도 못할 것이다. - P168

‘서해안 방위군’이란 게 조직되는(또는 거론되는) 중이었고, 해안 여러 지점에 전투식량 등의 보급품을 비축해두는 보관소를 세우자는 막연한 생각을 누군가가 해냈으며, 잉글랜드 남서해안 끄트머리의 보관소들을 조셉 경이 책임지기로 했던 것이다. 내가 그의 사무실에 소속된 이튿날, 그는 콘월 북부해안에 있는 ‘12마일 보관소’라는 곳에 있는 보급물자를 확인하러 가라고 했다. (중략) 가서 그 보급물자란 것이 쇠고기 통조림 열한 개뿐임을 알게 됐을 때, 마침 육군성에서 전보가 왔고, 추후 통보가 있을 때까지 ‘12마일 보관소’에 남아 보급품을 지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12마일 보관소에 보급품 없음"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너무 늦었다. 다음날 내가 ‘12마일 보관소’의 부대장으로 선임됐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중략) 내가 맡은 쇠고기 통조림 열한 개는 다른 알 수 없는 임무 때문에 이전에 왔던 장교 몇몇이 남겨두고 간 것들이었다. 그들은 리지버드 일병이라는 완전 귀머거리 노인네 하나도 남겨두고 갔다. 리지버드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나도 끝내 알아내지 모했다. 내가 1917년 중반부터 1919년 초까지 쇠고기 통조림 열한 개를 지키느라 거기 남아 있었다는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다.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 P170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내 소관하에 있는 물자의 수와 상태를 기재하라며 방대한 분량의 공문서를 보내왔다. 곡괭이를 비롯한 참호 구축용 연장들, 철조망 묶음, 담요, 방수 깔개, 응급치료 도구, 함석판, 자두잼이나 사과잼 통조림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모든 항목에 "없음"이라고 기재한 뒤 서류를 돌려보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 런던에 있는 상부의 누군가가 그 서류를 조용히 철했고, 다시 서류를 보낸 뒤 돌아온 서류를 다시 철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 P171

리지버드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여서, 나는 그가 입대하기 전에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지어 장에 내다팔고 살았던 사람이란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본연의 생활로 얼마나 빨리 되돌아가는지를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는 내가 12마일 보관소에 오기 전부터 이미 막사 주변 땅 한 곳을 일구어 감자를 심어두었고, 가을엔 반 에이커쯤 되는땅을 더 경작하더니, 1918년 봄에는 닭을 기르기 시작했다. 닭은 여름이 끝날 무렵 상당한 숫자로 불어났고, 그해 말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갑자기 돼지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P172

결혼하고서 처음 2-3년 동안 내가 힐다를 죽일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고 말한다면 믿으실지. 물론 실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생각 자체를 즐기는, 일종의 공상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자기 마누라를 살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잡히고 만다. 아무리 비상하게 알리바이를 조작한들, 누구 짓인지 완벽하게 밝혀지기 때문에 결국 꼼짝 못 하게 된다. 여자가 누구 손에 죽으면 언제나 남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데, 이것 하나만 봐도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얼핏 감지할 수 있다. - P193

나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로어빈필드에 다시 가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힘이 난 것이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실 것이다. 숨 쉬러 나간다는 것! 커다란 바다거북이 열심히 사지를 저어 수면으로 올라가 코를 쑥 내밀고 숨을 한껏 들이마신 다음, 해초와 문어들이 있는 물밑으로 다시 내려오듯 말이다. 우리는 모두 쓰레기통 밑바닥에서 질식할 듯 지내고 있는데, 나는 밖으로 나갈 길을 찾은 것이었다. 로어빈필드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 P240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한 것 하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본다는 생각일랑은 끝이다. 소년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쓰레기통 세상의 오염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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