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Kwon Sun-chan and Nice People K-픽션 12
이기호 지음, 스텔라 김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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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술을 마신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파트 단지 정문을 막 들어서려던 나를 그가 불러 세웠다.
저기... 교수님이시죠?
그는 맨발에 운동화를 신은 채 도로를 뛰어 건너왔다. 평상시 앉아 있는 것만 봐서 잘 몰랐는데, 그는 오른쪽을 다리를 조금 절었다. 손에는 A4용지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죄송한데... 이것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내게 종이를 내밀면서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얇은 철삿줄이 울리는 것처럼 여렸고, 몸에선 쉰내가 났다. 종이엔 남자가 대자보에 옮겨 쓸 내용이 적혀 있었다. 2014년 6월 3일 하나은행 권순찬의 모친 김복순의 농협 계죄로부터 일금 칠백만 원이 국민은행 김석만 계좌로 또 한번 입금....
나는 종이에 적힌 문장들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읽어나가다가 말고 남자에게 물었다.
한데, 이걸 왜 저에게....?
저기.... 맞춤법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이게 틀린 게 없이 정확해야 하거든요.....
- P50

더운 국을 먹을 때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저절로 남자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키우던 고양이가 가출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고, 군 시절 혹한기 훈련을 하면서 보았던 은하수와 언 강물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계통 없이 떠오르기도 했다. 늑골에 자잘한 돌무더기가 우르르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10월 첫째 주엔 아파트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에 특별 모금을 한다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딱한 사정에 처한 502호 할머니와 단지 정문 건너편 남자를 위해 작은 정성을 모으자는 취지의 안내문이었다.
- P56

김석만의 등장으로 ‘우리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진다. 우리는 이 사회에 고통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악인(강자)은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는 고작 자신들처럼 약하고 선한 사람들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약하고 착한 사람들은 서로에게만 화를 냈던 것이며, 당연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그들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중략) 우리 사회의 진정한 악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 겪는 무력증과 성냄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경재)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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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9-05-0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 해결을 위한 의사소통(또는 글쓰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짧은 이야기. 이기호의 소설을 좀더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