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서문
참회와 사랑의 고백

건축은 시대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요, 깨달음과 생활이 만든 환경이며, 인간의 정신이 대지 위에 새겨놓은 구축물이다. 젊은 날, 이런 생각으로 한국의 역사적 건축을 바라보며 [한국건축의 재발견]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3권의 책을 낸 지 벌서 10년이 가까워온다.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 나의 책을 읽었고 결점들을 지적하곤 했다. 내용상 오류도 많았고, 편집이나 책의 체제가 불비한 점도 많았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바뀌었고 달라졌다 .이 책은 월간 [이상건축]에 3년간 연재된 내용을 정리하여 출판한 것인데, 이 잡지는 누적된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건축계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건축이론과 비평을 무게 있게 다루었던, 보는 잡지가 아니라 유일하게 '읽는 잡지'가 폐간되었다는 아쉬움은 너무 크다. 뿐만 아니라, [이상건축]에서 발간했던 [한국건축의 재발견]시리즈도 절판돼,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어 원성도 꽤 일었다.
  이 책에서 다루었던 옛 건축물들도 그 10년 동안에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변해버렸다.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한 친구는 1-2년을 주기로 새로운 이론과 분야가 출현해 그를 따라가기도 벅차다며, 변하지 않는 과거의 건축을 다루는 내 전공을 무척 부러워하곤 했다. "지나간 역사가 어디 변하랴?" 하여 한번 공부로 평생을 우려먹을 수 있지 않느냐는 야유 섞인 부러움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찰과 건축문화재들이 중창불사라는 이름으로, 또는 문화재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엉뚱하게 변해버린 새 건축 환경은 내 책의 내용을 틀린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변한 것은 세월이다. 이 책의 내용을 쓰던 시절에는 '신진.소장'학자라는 타이틀이 익숙했지만, 이제는 '중진'이 되었고 곧 '원로'가 될 것이다. 강력한 이론과 개념에서 출발한 건축만이 좋은 건축,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아직도 혁명적 이론과 개념의 가치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주어진 조건들을 충실히 하나씩 풀어가는 성실함, 작은 성취에도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건강함, 일상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실용성, 무엇보다도 평범함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깨달음들. 대부분의 건축들이 가지고 있는 이 작고 소중한 가치들을 통해 새로운 건축의 모습을 엿보기도 한다.

 이런 저런 필요에 의해 새롭게 개정판을 펴내게 되었다. 펴집을 바꾸고, 내용도 현재에 맞추어 손을 보았다. 책의 제목도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건축적 사고는 10년 전, 초판이 출간될 당시에 맞추어져 있다. 오히려 미진한 점을 더 보강해 당시의 생각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내 건축 여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여정을 위해 정리해야 할 기행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까지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건축과 역사를 대해왔는지 모른다. 오로지 결승점을 향해,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듯 공부를 했고 생각을 했다. 미처 소화되지도 못한 생각들을 뒤로한 채, 글을 쓰고 책을 내기에 바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명성도 얻고, 사회적 지위도 얻었다. 이력서의 연구결과물 난을 채울 수 잇는 묵직한 여러 줄의 경력도 얻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목표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정이 경기가 아니라 건강과 사색을 위한 산책이라면, 연구의 방법도 생각의 순서도 달라질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가끔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다른 경주 코스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질주하고 때로는 휴식하며, 건축과 역사라는 거대한 숲을 즐길 것이다. 심지어 한 발로 뛰어도 보고, 멀리 뛰어도 보고, 좁게 뛰어도 보고, 제자리 뛰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 보지 않으려 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보는 재미에 푹 빠지고 싶다. 그러면서 보여지는 것, 깨달아지는 것들만 정리해도 의미 있는 성과들이 쏟아지기를 기대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욕심일까?

(중략)

"세상의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쑥스럽지만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다. 건축에 대한 사랑, 역사에 대한 사랑, 이 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

2006년 3월, 서리풀 마을에 떠 있는 13층 집에서
김봉렬


초판 서문

과거의 역사, 특히 우리와 직결되는 한국의 문화를 보는 눈은 두 가지 극단적인 편견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원초적인 문화의 산물로 비하하는 태도, 다른 하나는 근거 없는 칭송과 조건반사적인 감탄의 분위기. 근대화 시기에는 너무 폄하해서 문제가 됐지만, 현재는 오히려 맹목적인 애정이 문제다. 서구의 모든 한계를 한국문화가 극복시켜줄 것같이 맹신하거나, 혹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과거에 있는 것처럼 신화화하는 풍조가 조성되고 있다.
  과거의 한국건축을 마법과 같은 신비주의의 산물로 여기거나 박물관의 유물과 같이 동결된 문화유산으로 취급하는 한, 한국건축은 낭만적 회고나 강압적 애정의 대상은 될지언정 하나의 건축적 실체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풀려진 신화도 아니요, 박제화된 교과서도 아니다. 무엇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사실적인 감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따라서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에서부터 글을 시작했다. 역사적 건축의 현장은 늘 폐허였다. 이제는 사라져간 형태와 쓰임새, 소멸되고 만 기술과 재료들, 그리고 끊어져버린 건축적 생각들, 뿐만 아니라 해가 다르게 건물들은 사라지고 변형되고 파괴되어간다. 그러나 폐허는 온갖 껍데기들이 소거되고 본질의 속살을 드러내는 시작점이다. 정교한 상상력만 있다면 건축의 본질을 향해 탐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현장이다.
  건축을 통해서 역사를 읽고, 인간을 읽고 싶었다. 거꾸로 역사를 통해서 건축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쓰면서 간절히 희구했던 목표들이다.
  탐구를 계속하면서 몇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의 건축을 구성했던 생각과 과정이 현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 지식과 기술은 축적되지만 깨달음의 크기와 폭은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점, 국적과는 상관없이 건축이 갖는 보편적인 가치와 본질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현상의 묘사보다는 설화의 삽입과 지엽적 사실의 확대 해석, 추론과 가설이 난무했는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함이며, 그럼으로써 추론적인 이론들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객관적이라는 허울 아래 현재적 필요가 없는 과거의 탐구가 지적인 유희에 흐르기 쉽듯이, 현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와 이론에 뿌리를 두지 못한 실천이란 우연에 불과하다.

 

 이 책은 월간 [이상건축]에 1995년 11월부터 연재해온 내용을 다시 추린 것이다. 26회의 계획으로 1997년 12월까지 실린 내용이 예상보다 방대해져서 총 3권의 책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첫째 권은 비교적 역사적 관점이 부각된 내용을 추렸다. 그렇다고 모든 시대를 다루면서 시대적 변천과정을 서술한 연대기적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시대의 특정한 건축이 어떻게 탄생하는가의 공시적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둘째 권에서는 다양한 용도와 목적의 건축들 속에 담겨 있는 생활과 생각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읽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권은 주로 이론적인 내용들을 다루었다. 터잡기부터 세부기법까지, 그리고 한국건축의 집합적 성격, 불교신앙과 성리학적 정신이 갖는 건축이론의 상이점들이다. 첫째, 둘째 권보다는 약간 더 전문적인 담론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연재가 진행되는 도중에 소중한 분들로부터 많은 찬사와 충고를 받았다. 글이 너무 어렵다, 건축학자가 아닌 건축가나 일반 대중이 보기에는 너무 학술적이고 딱딱하다, 흔한 답사기같이 재미있게 쓸 수는 없는가... 아니다, 글들이 너무 대중적이다. 이제 학자의 길을 폭하고 저널리스트로 나서기를 작정했는가? 두 극단의 반응들이 들려왔다. 도대체 이 책의 성격은 무엇인가. 일반인을 위한 건축답사기인가, 아니면 건축인들을 위한 학술서적인가. 집필의 동기는 건축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한국건축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혹은 모두를 포함한 수준이 된 감도 없지 않다. 우리 문화와 건축에 애정을 가진 분들에게 이 책은 쉬운 책일 것이다. 반면 보물창고의 문턱 넘기를 주저하는 분들에게는 어려운 책일 것이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이 있었다. 밀실에서 혼자만의 작업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성원의 결과라는 점에서 남다른 기쁨을 느낀다.

(후략)

1999년 2월, 눈 덮인 의릉을 바라보면서
김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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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1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껏 빠져들어가 보십시오~~~ ^^

하이드 2006-04-1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장 시작했는데, 그닥 만만치 않네요.

Mephistopheles 2006-04-1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왕이면..^^ 시간나실때 책속의 건축물을 직접 답사 가시면
감회가 남다르실 껍니다..^^

하이드 2006-04-1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끈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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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다. 재밌다.


550페이지에 달하는 '손에 입맞춤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위인 세기의 연애소설.
책 보고 영화 봐야지. 하는 맘에 주말이 오기전에 부지런히 읽었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연애 이야기들은 그동안 너무 욹어먹어서 새롭지 않은건 물론이고, 식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다행히 식상하지 않고 무척이나 재미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그마만큼 보편적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밝은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묘사된 인물들을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우리의 다아시경( 우리의 다아시경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그러겠어. 그는 어짜피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 인걸) 의 알콩달콩 연애얘기와 감초로 제인과 빙리씨의 연애 이야기, 또다른 동생과 또다른 남자의 연애이야기도 물론 재미있고, 결말도, 클라이막스도 맘에 쏙 들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흥미로움 또한 이 소설을 읽고 또 읽게 만들어준다.

엘리자베스는 쾌활하고, 자기주장 분명하고, 활동적이며, 밝고, 뒤끝없으며, 지적인 여자다.
다아시경은 너무 잘나서 잘난티 팍팍 내고 다니는 그러나 알고보면 마음은 따뜻한, 게다가 여자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함) 어떻게 보면 가련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이다. 수많은 연애소설, 로맨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무수히도 보아왔기에,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만.

제인. 엘리자베스의 언니이자 베넷가의 첫째딸. 외모는 가장 아름답지만, 성격도 가장 아름답다. ( 말이 안되지? 말 안된다.쳇) 내숭파는 아니고, 천성이 선하고 착해서 '사물을 좋게만 보는' 희귀한 재주를 가진 여자다. '선한 천성'은 의외로 그녀의 '침착한 성격'을 끌어내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녀의 앞날에 나쁜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착한 주인공'에 심하게 알레르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인은 선하다' 는 명제는 그냥 인정해버릴 수 밖에 없다.

베넷씨. 다아시경은 그를 그리 좋지 않게 평가했지만, 나는 여기 등장인물 중에서 다아시경만큼이나 베넷씨가 좋다. 그의 비꼬인 유머감각은 최고다. 내 맘에 쏙드는 말도 어찌나 많이 하는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첫째가는 즐거움중 하나였다. 게다가 게으르다. 내가 이 소설 속에서 한 파트를 맡아야 한다면 난 '베넷씨'가 딱이다!

엄마. ( 이름 절대 생각안난다. 나오긴 하나? ) 평생 신경증을 앓는다고 죽는소리 하는 '이보다 더 경박할 수는 없다' 캐스팅 0순위인 인물이다. 옆에 있으면 얼굴 붉어지고, 딸래미들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

키티. 존재감 없음. 리디아. 별로 안 나오지만 엄마2.
메리. 셋째딸. 어려운 말 인용하려고 애쓰고( 알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곡 불러서 남들에게 깊은 인상 남기고자 하는( 피아노 잘 치지도 못하면서) 난감한, 역시 존재감 희미한 인물. 좀 가련하다.

위콤. 그래, 사실 읽으면서 가끔 휴 그랜트 떠올렸다. 사람 좋은 바람둥이역 잘어울렸는데, 음....

외숙모,외삼촌 . 교양있고, 조카들 일생에 도움됨.

콜린스. 베넷씨가 정말 좋아하는 콜린스. '분별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교육이나 교제를 통해 타고난 결점을 개선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키울 때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를 아주 비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비굴한 성격은 이제 머리는 나쁜데 사람들과 별 교제마저 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자만심과 예기치 않게 일찍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부심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상쇄되었다.... 그는 영부인의 높은 지위에 대한 존경심과 후원자인 그녀에 대한 숭배에, 자만심, 성직자로서의 권위 의식, 그리고 교구 목사로서의 권리 등이 마구 뒤섞여 오만과 아첨, 잘난 체와 비굴함의 혼합물이 되었다.' 고 한다. 죽이지 않는가. 콜린스씨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난 배우지도 않은 속독법으로 책장을 최대한 빨리 넘겼다.

이 외에도 이토록 생생한 인물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주옥같은 대사들. 그들이 어우러져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걸 읽는건 어찌나 재밌던지. 이들의 공통점은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다. 아무리 잘나고 현명한 주인공이건 잠깐 나오는 조연이건 이 제목에 메어 있지 않은 등장인물들은 없다. 질투,미움,시기,등이 판도라의 상자를 나올때 분명 같이 튀어나왔을 오만과 편견은 삶에서 피해가기 힘든 함정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 거쳐나왔을때 조금 더 성숙해지고, 혹시 또 아는가 보너스로 다아시경같은 멋진 남자가 따라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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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4-1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린스 영화에서도 정말 좀 빠지는 사람으로 나와요. 별로...
 
쿠바의 헤밍웨이
힐러리 헤밍웨이.칼린 브레넌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시류를 타고 마구 되는대로 나오는 전기의 탈을 쓴 폐지들이 있는가하면, 그것보다는 낫지만 역시 시류를 타고 나오는 진지한 전기들이 있다. 너무 위대하고 중요한 사람이라서 전기가 끊임없이 나오는가 하면,그 위대한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전기가 있다.

오래간만에  '애정으로 만들어진 전기'를 봤다. 엄밀히 말해 '쿠바의 헤밍웨이'는 통상 말하는 전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읽다보면 낚시하는 이야기랑 여자 이야기밖에 안 나오는데 뭐.  그리고 이 책이 위대한 작가 '헤밍웨이'에 관한 책일지언정, 헤밍웨이가 쓴 책도 아니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저런 선입견들을 가지고 dvd 끼워준다는 말에 덥썩 이 책을 사들었다.
그의 마초에 100%공감할 수는 없지만, 내 안의 아니무스를 부르르 떨게 하는 무언가가 이 책에는 있다.
그리고 그 희미한 무언가는 책 속의 바랜 사진들. 풍부한 사진들덕분에 드라마틱하게 업되어 이 책을 사랑하고야말게 만든다. 물론 처음 말했듯이, '헤밍웨이' 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기에 '헤밍웨이'를 미워할 수 없고, 이 책을 미워할 수 없는건지도 모른다.

이 책은 세피아빛 가슴뛰는 사진들과
헤밍웨이가 쿠바에 정착하게 된 쿠바의 '바다' 와 그의 여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바의 그에 대한 애정에 대한 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의 쿠바에서의 생활과 그의 글들 '노인과 바다', '프랜시스 매콤버의 짧고 행복한 인생' , '만류 속의 섬들', 그리고 '가진자와 못 가진자' 등의 실제 인물들과 상황들이 글의 직접인용과 오버랩 되어 보여진다.

이 책은 그저 헤밍웨이가 쿠바에 있었을적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덤으로 그의 주옥같은 글들을 일부나마 훔칠 수 있었고,  물고기 공포증 있는 주제에 바닷속 그 펄떡이는 반짝 빛나는 그 생물에 대해 조금 멋진가. 라는 생각 했었고, 쿠바의 헤밍웨이 사랑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절이 틀리고, 희대의 글쟁이 헤밍웨이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건 어쩔 수 없다. 나 이렇게 월급쟁이로 살다가 죽어도 되는걸까? '사랑하지 않는 당신은 유죄입니다' 라는 글이 나오는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란 사강의 소설이 있다. 이 책을 읽고나는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모험하지 않는 당신, 삶에 대해 유죄입니다. '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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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1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생가를 간적이 있었죠.
그동네에서 유일하게 지하가 있는 건물이였던 기억이 납니다.
유죄시면 형량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하이드 2006-04-1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은 생또한 평생 지겨워해라. 뭐 그런거 아닐까요?
오,헤밍웨이 생가는 어딘가요??

Mephistopheles 2006-04-1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잔인한 형량이군요
키웨스트요..
 
신의 등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22
엘러리 퀸 지음, 장백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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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건, 동서미스테리북스가 막 새로 나오기 시작할때였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절판된 책들, 새로 소개되는 책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읽고 싶은 책들은 많지만,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좋은 책들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나이들어 추리소설을 처음 열광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는 엘러리 퀸이었다.동서에서 나온 엘러리 퀸을 다 사서 읽는걸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그렇게 처음 열심히 읽다가 중간에 전혀 안 읽었고, 이번에 '신의 등불'을 읽게 되었다.

대만족이다.
'신의 등불'의 트릭이 데이빗 카퍼필드의 그것처럼 대단하다. 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재미있었다. '신의 등불'로 밝혀지는 트릭. 이 중편 말고도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와 관련된 단편들이 있는데, 경마라던가, 양키즈와 자이언츠의 야구라던가, 헤비급 챔피언쉽이 열리는 권투경기장이라던가.

여전히 밉지 않게 잘난체하는 퀸과 그를 돋보이게 하는 주변인물들.
다만 좀 좋을까 싫을까 싶은 점은 그의 애인 '패리스' 의 등장이다.
퀸은 그녀에게 홀딱 빠졌고, 그녀는 심지어 멋지다.
우리의 '퀸'이 여자에게 홀딱 빠지다니.
단편들의 소재가 '로맨스' 인 것들도 두개나 있다. 야구장이 배경인 단편과 경마장이 배경인 단편.

'신의 등불'을 제외하고는 각종(?) 경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는만큼 경기중계와 사건과 해결이 동시에 와글와글 나오는게 좀 정신사나울지도 모르지만, 각 단편에 등장하는 트릭들, 사건의 해결, 사건을 해결하는 위대한 사람( 잘났어 정말. 작가의 자아도취가 심한걸. 싶게도 어느 단편에서는 퀸을 계속 '위대한 사람'으로 칭한다. '위대한 사람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식 )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그 박진감 넘치는 경기만큼이나 생생하다.

뭔가 꽉 조인 느낌 아니고, 여유롭고 살짝 풀린 머리 비상한 엘러리 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벽난로 앞에 대자로 누워 계속 심심하고 따뜻할까 아니면 추위와 비를 뚫고 경시청에 가서 재미있는걸 찾아볼까 고민하는 퀸' 이라던가. 사건이 나도 '야구경기를 보고 있는 퀸을 방해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라며 무시하는 퀸이라던가. 귀여워, 귀여워.

재치, 유머, 고전의 인용.
내가 왜 그동안 모스경감할아버지에만 올인하고 있었던거야.
젊디젊은 퀸을 놔두고.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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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4-1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사 추리소설의 묘미를 느껴가는 저에게 앨러리 퀸은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작가네요. 음 보고싶어라.... ^^;;(죽을때까지 다 볼수 없다는게 너무 슬퍼요.)

하이드 2006-04-1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저 한국건축이야기 어제 샀어요. 다른 책들 같이 사고 싶은건 참고, 일단 이 책 내일 도착하면 당분간은 이 책들만 읽으려구요. ^^ 좋은책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앨러리 퀸의 소설이 편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단편 좋아하신다면, 이 책 추천하고 싶네요. ^^

Mephistopheles 2006-04-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도 역시 내공이 고강하신 고수삐끼 시군요...^^

하이드 2006-04-12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얘깁니다.

가을산 2006-04-1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초강력 바람이라니....

자비눌 2007-03-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더 늙은 브라운 신부를 좋아한답니다. ;;
 
 전출처 : 나귀님 > 영화와 소설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
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 늘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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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원작 소설의 관계는 항상 경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경우는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할리우드의 역사는 그야말로 훌륭한 소설을  영화화한답시고 망쳐놓은 경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원작 소설을 개판 오분 전으로 망쳐놓은 졸작 영화가 예나 지금이나 무수히 양산되고 있다. 어째서일까? 가장 큰 문제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원작 자체가 무슨 대단한 스펙터클도 아니고, 무슨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뭔가 "볼 거리"를 잔뜩 우겨넣으려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작품만이 남는 것이다.(문득 숱한 "고전"들의 영화화 대열 와중에서 희생된 <주홍글자>, <허영의 시장(배니티 페어)>, <몰 플랜더즈> 등이 생각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하나같이 "영화화"되어도 별로 매력을 발휘할 것 같지 않은 소설들 말이다. 아, 물론 그중 압권은 코폴라의 <드라큘라>였다. 고딕 호러 소설에 무슨 뚱딴지 같은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를 갖다 끼워맞추려다보니 정말 코미디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영화가 원작 소설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요, 기껏해야 원작 소설에 "버금가는" 수작으로 인정받으면 감지덕지일 것이다. 물론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가 없진 않다.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대부> 역시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즉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가 "마리오 푸조의 <대부>"과의 승부에서 만장일치로 판정승을 거둔 격이었던 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무척이나 잘 만든 영화 때문에 원작이 도리어 빛을 잃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나 역시 작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코폴라의 <대부>를 다시 보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말 그대로 "한 장면도 버릴 만한 것이 없는 영화"가 코폴라의 <대부>였다.(물론 여기서는 <대부> 1편을 말한다.) 원작 소설이 잘못되었다거나 졸작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 원작에 근거해 만든 영화가 너무나도 완벽했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원작자인 마리오 푸조에겐 이것이야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코폴라의 <대부>"만 기억하지, "푸조의 <대부>"를 기억하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영화를 먼저 보고 뒤늦게야 소설을 펼친 사람은 도리어 푸조의 <대부>가 지닌 매력에 홀딱 빠져들런지 모른다. 나 역시 이 내용 가운데 뭔가를 찾아보기 위해 한밤중에 책을 펼쳤다가, 영화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분위기에 홀딱 빠져들이 밤새 "책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은 영화처럼 일관된 줄거리를 따라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여러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일면 산만한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영화 1편과 2편을 미리 본 사람이라면 미처 영화에서는 설명되지 않거나 피상적으로 넘어갔던 장면에 담긴 잔재미를 깨닫고 무척이나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마이클이 병원 앞에 서 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이 누구였는지, 소니가 어째서 아버지를 따라 범죄의 길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마이클이 대대적으로 "소탕"을 하는 장면에서 경찰관 제복을 입은 "킬러"가 누구였는지 등등.) 물론 영화에서는 그저 까메오 출연에 불과했던 가수 조니 폰테인의 눈을 통해 묘사된 할리우드의 추태는 이 원작이 산만하게 보이는 데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제법 화제를 모았음직한 소재가 아니었을까.(훗날 영화에서 그 부분을 눈에 띄게 줄여버린 것은 코폴라의 혜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재미라는 면에 있어서는 영화 못지 않은 소설이고, 덧붙여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생략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인물(소니, 톰, 프레드, 클레멘자, 테시오)의 성격이 좀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는 점은 일종의 특별선물이나 마찬가지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차라리 영화 1편과 2편을 (순서대로) 먼저 보고나서 책을 읽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좀 더 명확한 줄거리를 머릿속에 담아두게 되어 책을 읽으면서도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반면,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는 재미가 결코 반감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대부>의 영화와 소설은 아무래도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너무 앞서나가진 않았고, 원작은 미처 영화 속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와 소설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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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0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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