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굿바이 쇼핑 - 아무것도 사지 않은 1년, 그 생생한 기록
주디스 러바인 지음, 곽미경 옮김 / 좋은생각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이 모든 생각이 떠오른 건 12월 중순이다. 때마침 나는 뉴욕의 길모퉁이에 생긴 눈 섞인 물웅덩이에 떨어진 장갑 한 짝을 집으려고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참이다. 그와중에 종이 쇼핑백이 진창에 닿으면서 내용물이 젖은 모서리로 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버둥대는 사이 다른 쇼핑백들이 머리와 양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지나간다. 이게 전부 월마트 때문이란 생각이 퍼뜩 든다. 이런 것이 자유야? 나는 자문했다.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쇼핑백을 마른 땅으로 주워 모으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 난 이제 사지 않겠어 I'm not buying it"
제목, 굿바이 쇼핑, 원제 Not buying it, 과 저자가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만 보면, 이것은 또 쇼퍼홀릭의 이야기인가 싶다. 집세 낼 돈이 없어 걱정하며 600불짜리 마놀로 블라닉을 쇼핑하는 'SATC'의 캐리나 <쇼퍼홀릭>의 레베카처럼 말이다. 접때 케이블에서 본 '쇼핑중독'에 빠진 어느 런던 여자가 생각나기도 하고.
근데,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마놀로 블라닉이 뭡니까? 먹는 건가요? 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좀 더 넓은 '소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유혹을 넘어선 '시스템', '쇼핑'으로 메우려고 하는 밑빠진 영혼의 독.. 그러니, 이것은 '나는 합리적인 쇼퍼.라고 자부하는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편집자인 주디와 정치 컨설턴트인 폴은 중산층에 해당하는 프리랜서다. 돈 많이 드는 땅 미국에서, 수입으로는 좀 빡빡할지도 모르지만, 시골의 5만평 대지와 집, 그리고 뉴욕 부르클린의 30만불이 넘는 집을 가지고 있다. 부동산 자산으로는 100만불 정도 가지고 있다. 부부가 함께 살며 한 명만 '아무 것도 사지 않겠다' 고 결심해서 될 일이 아니다. 주디의 어느 처참했던 오후 이후 부부는 함께 결심한다. 생필품과 식료품만 사기로 한 그 결정에서 '이야기거리'와 '만약 내가 1년동안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에 대한 생각거리가 무궁무진하게 생긴다.
저자의 자산뿐만 아니라 저자의 취향도 이야기해두어야겠다. 채식주의자에 환경주의자. 뉴요커와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는 생필품에서 빠져서 무지 괴로워하지만, '뉴요커'는 뺄 수 없었다.) 비싼 프랑스 원두를 사서 먹지만(생필품에 들어갔다) 밖에서 커피를 사먹지는 않고, 거대기업과 핸드폰을 반대하며, 집에 전자렌지가 없다.
12월 31일 밤까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조금 과다하게 사두고, 요리하느라 그랑마니에 리큐어 한 술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폴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제일 큰 리큐어 병을 사 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12월 31일 밤 '아무것도 사지 않는 1년'을 위해 건배하고, 밤 10시 콘크리트로 만든 작은 아기 코끼리 장식물이 소개된 것을 표시해둔 카탈로그를 발견하고 마지막 주문을 한다.
콘크리트 아기 코끼리 장식물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사지 않는 1년'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1월, 2월, 3월 ... 이렇게 월별로 진행되고, 안에는 다이어리처럼 날짜와 그날 그날의 소회와 진행사항들을 적고 있다. 챕터가 날짜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날짜별로 읽는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만큼 각각의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알차다.
그들은 '생필품'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고, '자발적 가난' 그룹에 가입하기도 하며, '사지 않는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사지 않음'으로 인해 인간관계와 주흥을 잃어버리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며, 필요하지 않는 것을 사는 것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무언가를 사서 선물하며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쇼핑의 의미'에 새삼 눈을 뜨기도 한다.
자기반성으로 시작했지만, 쇼핑은 공허하고, 자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발적이 아니고, 지구를 망치는 악의 축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하며 쇼핑하는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무것도 사지 않으며 절제했던 1년의 경험, 혹은 수행(?)으로 '소비'의 의미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된다는 해피엔딩이다.
과장되지 않고, 소소하고, 담담하게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소비'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나는 감히 '아무것도 사지 않는 1년'을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소비 생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다만, '필요한 것만 사기' 는 가장 쉬운 일인가, 불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물건은 필요해서 사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생필품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적당히 안락한' 삶이란 언제나 손이 닿는 한 뼘 너머에 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