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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평점 :
레이먼드 카버... 경력이 화려한 작가이기는 하나 나에게는 생소하다. 그래서 이 책도 그의 이름을 보고 고른게 아닌 순전히 예쁜 제목에 이끌려 저절로 손이 가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마치 멜로영화나 연애소설의 제목같은 책이지만 열일곱편의 단편들을 접하면서 매우 놀랐고, 한편으로는 실망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단지 이 책은 겉모습만 예뻤다 뿐이지 안의 내용 그 자체는 한없이 차갑고 냉혹했기 때문에...
처음 몇편을 읽고는 짧지만 쉽지 않은 단편에 기가 질려 책을 덮었다가, 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매력에 다시 펴서 끝까지 읽게 되었다. (그 묘한 매력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라는게 자기가 지운다고 애쓴다고 쉽게 지워지는게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는 꺼내기 힘들어질 마음의 창고 속에 쳐박아 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창고 속 그것들은 잠시나마 잊은 채, 밝고 건강한 기억만을 꺼내어 회상하며, 그것에 추억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둔다.
이 책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에서는 그 창고 속 쳐박아 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치 어둡고 또 무겁고 냉혹한 일상을 마치 인생이라는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캡처해낸 듯, 아무런 꾸밈없이 칼로 도려내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빛이 없는 깊은 동굴속의 그 어두움과 막막함만을 보여주기 보다는 우리가 좀 더 넓게 포용하는 자세로 관조적으로 동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끔 해준다. 바로 이 점에서 내가 그의 소설에 큰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사실 단편 하나하나를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색깔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이 느낌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간혹 그는 인간의 악한 면을 그 어떤 꾸밈없이 잔인하게 파헤치지만 나는 그 인물들의 이면에 또다른 나약함과 더불어 그에 따른 연민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게 그렇지 않은가... 좋은 일이 있으면 또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고, 살아오면서 그 무엇이든 한번쯤 잘못해보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이 책을 읽고난 후, 문득 나도 내 묵혀두었던 창고 속 기억들을 추억이라는 명목으로 마치 수수방관하듯 한번 펜으로 갈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