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처럼 한 없이 어둡고 또 어두운 소설에서 누구나가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찾아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비록 그 내용이 갈수록 좀처럼 희망에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끝은 다르겠지라며 '희망'적인 엔딩에 대한 '희망'을 갖고 책장을 넘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잔인하게도 끝까지 희망은 보여주지 않은채 이게 바로 현실이라고 단단히 못박아두고 있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제도의 울타리 밖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거나 그러한 울타리 자체를 파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가족 구성의 우연성이 곧바로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도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파헤쳤다는 점에서 변혁의 불가피성을 은밀히 내비치고 있다. -p.338-
그런데 저 글 속에서 한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수가 없다. 가족 구성의 우연성이 곧바로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도적으로 용인된다면 편부모 혹은 책의 주인공처럼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는 무조건 삐딱한 길로 갈 수 밖에 없단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겠다고 나름대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의 경우는 아주 어렸을적부터 철이 들었거나, 혹은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줄 누군가가 있었기에 운명을 거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평범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일수록 바르게 자라서 바른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조금의 의문은 들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틀린말도 아닌 듯 하다.
책은 열두살 소년의 눈으로 쒸어져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관점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라는 이 한 문장이 책의 첫장에 쒸어져있어 독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열두살의 주인공은 이미 늙은 소년이기에, 매춘부로서 살아가는 누나를 나름 이해해주고, 할 말과 하지 못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갖추었으며, 그 현명함 속엔 능숙한 거짓말도 끼어있다. 그리고 같은 나이의 또래 친구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아 말을 섞지 않은채 학교에서는 오로지 혼자만의 고독으로 지내고, 자연스레 그런 주인공에게 '왕따'라는 호칭이 붙게 된다. 이런 주인공은 할머니와 지하 단칸방에서 둘이서 살아가다 할머니가 죽게되자, 열네살에 가출했던 배다른 누나가 찾아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데려가게 된다. 열네살때의 가출 이후로 술집을 전전하고, 스물네살이 되자 본격적인 매춘부가 되어서 일억원에 달하는 빚을 갚고 있는 누나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주인공은 낮이나 밤이나 누나와의 잠자리를 위해 집을 찾아온 낯선 남자들을 보게 되고, 매춘부로서의 누나가 싫어 빚을 갚아주고자 한다.
열두살의 소년이 세상을 꿰차고 볼 수 있을정도의 '가난한' 현실이 실제 존재하는 현실이기는 한걸까 싶을 정도로 책은 밑바닥 인생을 소년의 눈으로 잔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일인칭 화자가 소년이기에 독자로 하여금 더욱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물질의 풍요로움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가난을 말하는 소설은 있다. 그렇지만 이를 소설가 방현석은 빈곤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빈곤'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에 대한 소설은 극히 적다. 그만큼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지금의 가난을 다룬 소설의 수만큼이나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는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소수의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