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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연암 박지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역사 교과서에 나온 북학파의 일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알고 있지 않던 내게 연암 박지원이 문장에 이토록 능하고 출중하다는 사실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그러고보니 책의 가장 앞에 소개되어진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고등학교 시절에 언어영역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로부터 몇 년이나 흘러 이 책을 접하고 연암 박지원은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인물로 다시 자리잡았다. 보통 사람들의 존경하는 위인들 중에 사실 연암은 별로 없다. 세종대왕이나 정약용과 같은 업적이 뚜렷한 위인들을 많이 꼽고 관련 책들도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데 도대체 연암의 이토록 주옥같은 여러 문장들은 왜 널리 알려지지 않은지 통탄할 지경이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연암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청을 배척하는 문화에서 실용학문의 수용에는 적극적인 입장이면서도 청에 대한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켰던 인물이고, 부인과의 사별 후에도 첩을 두지 않고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내게 가장 인상깊은 문장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소개된 '큰누님 박씨 묘지명'인데 큰누나의 죽음과 함께 어렸을 적 철없던 시절에 큰누님에게 짖궂은 장난으로 속상하게 했던 기억이 회상되는 구조이다. 내가 이 묘지명을 처음 접했을 때도 가슴이 뭉클했었는데 다시 보아도 그 느낌은 여전하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누구에게나 뭉클함을 전해줄 수 있는 연암의 필력이라고 본다.
연암은 책을 읽을 때 무척이나 느리게 읽었다고 한다. 속독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을 때 다독보다는 정확하고 꼼꼼하게 읽어서 책을 덮고도 책을 정확히 기억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 그는 박학함을 견제했는데 책을 많이 읽어서 습득한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은 진정 똑똑함이 아니라 포장되고 허황됨에 불과하다고 꼬집고 있다. 내가 바로 박학함을 지향하기에 다독이 습관이 되었는데 연암의 이런 독서와 학문에의 철학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내가 지식 습득에 있어서 잘못된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연암의 여러 문장에 대해서 주해와 평설을 달아서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책의 핵심은 분석하는 글이 반이고 이처럼 해석해주는 게 반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듯 싶다. 그러나 내가 보통 이런 책을 읽으면 해석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추측을 하고 근거가 명확해보여도 직접 글을 쓴 사람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글들과 달리 연암의 글 속에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만큼 명료함이 돋보였고 가끔 드러나는 난해함은 충분히 신빙성 있는 설명이 더해져서 무엇보다도 연암의 여러 주옥같은 글들을 의심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연암이 이제는 내게 역사 책 속에 이름 세 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훌륭한 문장가이자 후손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몸소 보여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위인으로 각인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