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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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자세츠키라는 이름의 한 러시아인이 전쟁터에서 폭탄 파편을 맞아 좌측 두정 후두부가 크게 손상되는 뇌 손상을 입었다. 뇌 손상으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비정상적인 기억능력으로 총명함을 자랑했던 그가 단어의 의미도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또 게임을 하는 것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대단한 의지력과 인내심으로 20년 동안 3천 쪽에 달하는 일기를 쓰게 되었고, 심리학자인 루리야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츠키의 증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일기 중간에 루리야의 심리학적이고 의학적인 소견이 첨부되어 있는 형식으로 자세츠키에 의해서 인간의 뇌의 부분적인 기능에 대한 탐구의 목적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무려 3천 쪽에 달하는 그의 일기를 책으로 엮음에도 증상의 특별한 변화가 보이지 않고, 루리야의 살아 있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낭만주의 과학'을 전제로 엮은 책은 독자에게 흥미를 제공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보여진다. 그저 환자의 차트를 보는 듯한 지루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집중력을 떨어뜨렸고, 에필로그에 이르러서는 자세츠키가 이런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된 전쟁의 위협성과 혐오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일관되지 못한 내용 또한 독자로서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자세츠키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가 좀 더 풍부했더라면 인간으로서의 그에 대해 좀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느낀다.

전쟁의 폐해로 인류 역사상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거나 불구의 몸이 되는 등 인간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간이 입은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다. 자세츠키 또한 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스스로를 포기 하지 않았고, 충분히 비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없는 인내와 의지를 발휘하여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전쟁의 잔혹함과 인간의 뇌에 대한 탐구보다도 자세츠키라는 사람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춰서 읽고 싶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을 다룬 차가운 과학을 낭만주의 과학이라는 포장으로  충분히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은 냉철함은 낭만주의라는 단어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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